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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야(_hareni_nare)_테루테루보즈.png

곧 장마가 시작되니 어떠니 저택이 한바탕 소란스럽긴 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빗줄기가 쏟아질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는데. 마치 우기인 정글의 한 가운데에 있는 마냥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쏟아지는 빗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봄비와는 다르게 우악스럽게 창을 때리는 굵은 빗줄기에 가뜩이나 오래된 저택의 창틀이 삐걱대는 소리를 냈다. 창 너머로 보이는 거무스름한 먹구름 사이로 번쩍이는 빛줄기가 보이더니 이어 쾅, 천둥소리가 세상을 뒤흔들 기세로 그 울음을 토해냈다. 헤니투스 저택 이곳저곳에서 그 소음에 깜짝 놀란 이들의 비명이 분명 울려 퍼졌으리라. 확신하지 않고 이리 추측할 뿐인 것은 검은 용의 방음 마법이 참으로 위대하여 방 안으로 들어오려 드는 바깥의 소리를 성실히 상쇄시키고 있기 때문이었으니. 비 오는 날이면 나곤 하는 비릿한 물 내음도 없었다. 모두 위대한 용 라온의 작품이었다.

새삼 귀족의 삶이란 참 편한 것 같다고, 귀족의 삶을 살게 된 지 겨우 이삼여 년이 지났을 뿐인 김록수는 생각했다. 일하는 데 날씨의 구애를 받지 않고 오히려 비가 오면 바깥 활동을 취소하고 집 안에서 푹 쉴 수 있다는 게, 또 저택 안에서 대부분의 일을 처리할 수 있으며 편의 시설도 이 안에서 누릴 수 있고 집안일은 따로 해주는 고용인들이 있다는 사실이 한국에서는 허황된 꿈으로만 가지고 있었던 낙원의 이미지와 딱 맞아떨어져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김록수는, 케일은 노곤하게 가라앉은 의식을 겨우 끌어올리며 무릎 위에 자리를 잡고 앉은 온의 머리를 가만 쓰다듬었다.

날씨로는 거슬릴 게 하나 없는 최적의 환경이 조성되니 이번에는 의식의 저편에서 퐁퐁 솟아오르는 기억들이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숨소리와 따끈한 고양이의 체온에 밀려오는 수마를 떨쳐내지 못하고 눈을 감으면 지금 애써 지우고 있는 그 시절의 꿈에 잠식될 것 같았다. 필히 악몽일 것이다. 김록수가 기억하는 장마의 이미지 속에는 결코 좋은 기억이 없었기 때문에. 갑작스레 무너진 세상 속에서 빗물을 받아먹으며 사흘을 버틴 일은 약과였다. 사람이 몰려있는 번화가에서 몬스터가 나타났는데 비는 내리고 협회와의 연락은 끊긴 상황이라면. 상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단 게 당기네, 이제는 또렷해진 시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한스가 두고 간 간식이 있을 터였다. 정 안되면 애들이 가지고 있을 사과 파이라도 달라고 해야지.

간식을 찾아 헤매던 시선이 창가에 기대 소리 죽여 대화를 하는 세 아이에게로 향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최한은 어른이지만. 케일의 시선을 느끼고 이쪽을 향해 수줍게 웃어 보이는 최한의 모습에 다시금 생각한다. 저렇게 웃을 수 있으면 아직 소년이지 뭐. 웃음을 무시하기도 뭐하고 마주 웃어주기도 뭐해 그저 고개를 한번 끄덕여주었다. 다시 한 번 환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이번에는 무시로 응했다.

새삼 저 아이들도 비에 대한 좋은 추억은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코가 석잔데 지금 누구 걱정을 하나 싶기도 하고. 이번에는 영웅의 탄생에 대한 잡생각을 하고 있으니 최한과 라온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어디 좀 다녀오겠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빨리 갔다 오라는데~"

 

뭐야? 뭐야? 무슨 일인데. 케일에게 붙잡힐세라 우당탕 소리까지 내가며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가는 둘의 뒷모습에 황망한 기분까지 들었다. 기대하라는 건데. 우리 재밌는 거 할 거라는데! 케일의 발치까지 다가와선 그 주위를 뱅뱅 돌며 홍이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목덜미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길한 예감에 케일은 한숨만 깊게 푹푹 내쉬었다. 그런 케일의 손을 온이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토닥여주었다.

소드 마스터의 신체적 조건과 용의 마법을 아낌없이 남발하며 저택 내부를 뛰어다닌 탓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공간 주머니를 흔들며 최한과 라온이 돌아왔다. 이제 좀 무슨 상황인지 물어보자고 반쯤 불만을 품은 눈으로 입을 떼려는 찰나 온이 케일의 무릎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두 묘족 남매가 폴짝거리며 라온이 들고 있는 아공간 주머니를 붙잡으려 들었다.

 

“이게 뭐냐는데.”

“재밌는 거라는데! 최한이 알려주기로 한 놀이라는데.”

 

최한이? 고개를 기울이는 케일의 시야에 특유의 의기양양한 포즈를 지으며 어깨를 쫙 펴는 라온이 비쳤다.

 

“위대한 내가 아직 모르는 게 있었다! 그래서 최한이 알려주기로 했다.”

 

집안에서는 놀 수 있는 방법이 한정적이다 보니 지루해하는 애들을 위해 새로운 놀이라도 고안해냈나 보다. 활동적인 애들인데 언제까지고 집 안에서 책만 읽으라고 할 수는 없긴 하지. 사실 방수 마법을 건다면 밖에 나가도 무리 없이 활동할 수 있겠지만 굳이 케일은 그 사실을 아이들에게 상기시키지 않았다. 그 말을 꺼내자마자 제일 먼저 방수 마법이 입혀져 밖에 내보내질 사람이 본인일 것이라는 사실을 케일은 잘 알고 있었다. 그냥 두면 네 명이서 알아서 시간을 때우며 잘 놀 것 같아 케일은 그대로 다시 의자에 늘어졌다. 귀찮은 일에 끼는 건 딱 질색이었다. 나 말고 놀아줄 사람도 있는데 굳이…….

 

“이거 완성하면 비가 그칠 거라고 했다. 그러면 약한 인간이 좋아하는 외출할 수 있지 않나!”

“내가, 뭐?”

“외출이다, 인간!”

 

그렇게 방구석에만 박혀있으면 지금은 괜찮겠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힘들다고 했다! 지금도 내 앞발보다 약해서 어떻게 걸어 다니는지조차 모르겠다. 의기양양한 자세 그대로 라온이 잔소리를 퍼부었다. 요즘 산책도 안 한다는데. 맨날 잠만 잔다는데. 홍도 잔소리에 가세했다. 도대체 누가 보호자고 누가 피보호자인지 알 수 없을 잔소리 세례에 질린 표정으로 점점 더 의자에 파고들 기세인 케일의 귀찮음 가득한 얼굴을 보며 최한이 웃음을 터뜨렸다.

 

“빨리 만들어야 빨리 비가 그치지 않을까? 그래야 밖에도 나가지.”

 

케일의 얼굴이 조금 더 일그러졌다.

 

“그래서 뭘 하냐는데.”

 

잔소리가 오가는 와중에 유일하게 말을 보태지 않고 그저 테이블에 폴짝 올라가 라온이 가져온 아공간 주머니를 앞발로 툭툭 치며 관심을 보이던 온이 물었다.

 

“천 인형을 만들 거다!”

“천 인형?”

“그렇다! 하얀 손수건으로 인형을 만들어서 창문에 매다는 거다!”

“그러면 비가 그친다고 하는데.”

 

재밌겠는데! 온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눈을 반짝였다. 그 옆으로 라온과 홍이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누나도 같이 하자는데. 최한이 알려준다고 했는데!”

“나도 선명히 기억이 나는 건 아니라서…. 몇 번 해봐야 알 것 같아.”

“그래도 좋다! 부집사 한스가 장마라고 했다. 비는 내일도 모레도 온다고 했다!”

 

아공간 주머니에 얼굴을 집어넣을 기세인 아이들을 뒤로 물리고 라온이 주머니에서 준비한 재료를 꺼냈다. 이게 인형의 몸이 될 거다! 손수건 크기의 흰 천 뭉치가 제일 먼저 라온의 손에 쥐어졌다. 자수 연습을 위한 천으로 보였다. 릴리나 바센의 자수 수업을 위한 재료로 보이는데 어쩌다 저렇게 많이 남은 건지. 깔끔하게 마감이 잘 된 손수건 수십 장을 테이블 한편에 잘 내려놓은 라온이 이번에는 검은 마커를 꺼냈다. 이걸로 얼굴을 그릴 거다! 그럼 이건 뭐냐는 건데. 한스가 온, 홍 남매의 정체를 아직 알지 못했던 시절, 둘을 놀아주기 위해 잔뜩 사둔 실타래를 발로 툭툭 건드리며 온이 물었다. 그건 말이지…….

 

"케일 님도 같이 하실래요?"

 

아이들이 재료에 대한 설명을 주고받는 동안 재료를 머릿수대로 분배하던 최한이 다가오는 인기척에 케일을 돌아보았다. 배시시 웃는 그 얼굴을 마주 바라보며 눈을 느리게 끔뻑인 케일이 말했다.

 

"할래."

 

***

 

 

케일 헤니투스는 손재주가 없다. 그것이 현재 케일 헤니투스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김록수의 영향인지 원래부터 ‘케일 헤니투스’에게 손재주가 없었던 탓인지 아니면 공평하게 둘 모두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케일로서는 알 방도가 없었다. 김록수로 살았을 때에는 이런 놀이에 잘 참여하지 않았고, 케일은 망나니로 살던 탓에 감히 손재주를 발휘할 만한 일을 시킬 담 큰 사람이 없었던 까닭이다. 하여튼 명백한 사실은 케일 헤니투스는 무언가 만드는 일을 제일 못한다는 점. 그리고 벌써 다섯 번째로 재료를 망가뜨렸다는 점이었다. 차라리 ‘가짜 암’ 복장을 만드는 일이 쉬웠다. 그때는 굳이 잘 만들 필요가 없었으니까.

분명 아는 인형이었다. 만들어 본 기억은 없지만 어린 시절 비가 오던 날에 같은 반 친구들이 만들던 것을 어깨너머로 본 적이 있었다. 테루테루보즈라는 이름의 기우제 인형. 한국에서 유래된 인형은 아니었고 바다 건너 나라에서 전해진 풍습이었다. 비가 오는 날 하얀 천으로 인형을 만들어 처마에 걸어두면 비가 그친다는 미신. 비가 그치면 바깥 활동은 물론이고 대규모 이불 빨래에 끌려가야 했기 때문에 굳이 비가 그쳤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지만 다 같이 기우제 인형을 만들 때엔 꼭 빠지지 않았었지. 케일은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역시 케일이 손재주가 없는 원인 중 김록수의 지분이 적지 않은 것 같다. 그 시절 아이들이 그렇게 죽어라 김록수로부터 재료를 사수하려 들었던 걸 생각하면.

재료라고 해도 사실 그렇게 특별한 건 아니었다. 하얀 천이라곤 센터에서 비상시를 대비해 하나씩 가지고 다니게 하던 손수건뿐이었는데, 여기에 네임 펜으로 얼굴을 직직 그렸다간 하루 종일 혼이 났기 때문에 인형의 재료는 주로 종이나 휴지가 되곤 했다. 휴지가 제일 괜찮았지. 둥글게 말아 솜 대신 인형의 머리를 부풀리는 데 쓸 수도 있고 하늘하늘하게 늘어질 몸통 부분의 모양을 잡기 쉬웠으니까.

최한과 아이들은 그새 창문 한 쪽을 빼곡히 채울 정도로 많은 인형을 만들었다. 테이블 한쪽에 수북이 쌓인 인형을 바라보며 추억에 잠기고 있었는데 그 시선을 또 어떻게 해석한 건지 창문에 인형을 매달려다 말고 흠칫거리며 케일을 바라보는 아이들이 있었다. 난감한 표정으로 케일이 만든 엉망진창인 기우제 인형과 그런 지옥에서 올라온 비주얼의 인형을 만들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화려하고 나른한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평균 9세는 얼굴 가득 드러난 심란함을 숨기지 못하고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저, 저기 금화가 날아간다!”

 

행동 대장 역할은 라온의 몫이었다. 돈이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라온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가 돌아간 케일의 눈치를 살살 살피며 온이 케일의 인형을 제 품에 끌어와 숨기고 홍이 저희가 만든 인형을 대신 그 자리에 올려두었다. 묘족다운 은밀하고 신속한 움직임이었으나 풋, 웃음을 참지 못한 최한 탓에 케일에게 모든 만행을 들키고 말았다. 케일은 어이가 없어 그저 웃어버렸다.

 

“그런데 최한.”

“네, 케일 님.”

 

잠시 고개를 기울이며 무릎을 두드리던 케일이 아이들 표 인형을 조심스레 집어 올려 이리저리 살피며 말을 이었다.

 

“비가 그치면 어디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나? 애들은 그냥 놀러 가고 싶어서 그렇다 쳐도….”

“비가 그치면…….”

“그치면?”

“… 시가지에 새로 생긴 카페가 예쁘다고 합니다.”

“카페가?”

“네, 그리고 서점에서 보고 싶은 책도 있고….”

 

마법을 써 동그란 얼굴에 뾰족하게 고양이 귀를 세운 손수건 인형과 용의 뿔을 붙인 인형을 자랑하러 케일에게 다가가 무릎에 고개를 기대고 앉은 라온을 쓰다듬으며 계속 이야기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최한은 조금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데이트, 신청…… 하고 싶어서요.”

“어? 어…, 어……?”

 

약한 인간, 최한아! 어디 아프나? 귀가 빨개졌다! 얼굴이 빨갛게 익어 김이 새어 나올 지경인 둘을 번갈아 바라보던 라온이 무릎 위에서 펄쩍 뛰어오르며 말했다. 아프면 안 나가도 되는데! 일단 쉬자는데! 정신없이 발치를 빙빙 도는 아이들을 어찌 말리지도 못하고 케일이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했다. 연애 초짜에겐 갑작스럽기만 한 한 보였다.

비야

@hareni_nare 

[ 테루테루보즈 ]

__________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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