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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장마 전선에 들어서면서 전국 곳곳에 호우예비특보가 내려진 가운데 특히 이번 장마는 많은 비와 함께 길게 이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예상 강수량은...-

 

 

완전한 여름의 더위가 찾아오기 전, 세상을 한번 식히듯 긴 장마가 찾아왔다. 선선한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습기에 축축 늘어지는 몸에 힘을 줘 곧은 자세로 카운터에 앉아 있는 알베르는 카페 창밖으로 쉬지 않고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좀 전에 확인한 일기예보를 부정하듯 큼직한 글씨로 ‘[속보] 호우경보 발효’라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하곤 헛웃음을 터트리며 알베르는 허리에 두른 회갈색 앞치마 주머니에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지겹도록 길어질 장마 소식에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하루 종일 열심히 돌아가는 에어컨 덕분에 카페에서 일하는 동안은 밖보다 시원하고 덜 습한 공기 속에 있을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널널하다 못해 지루한 가게를 둘러보며 물방울 맺힌 유리잔의 아이스티를 벌컥 들이키고 입안으로 굴러 들어온 얼음을 아작 씹었다.

 

 

 

***

 

 

 

1년가량 세계여행을 다녀온 알베르는 복학 전까지 남은 몇 달간 홀로 느긋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일찍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알베르는 방 안의 창문을 활짝 열고 침대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7월이 다가오는 것치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알베르의 앞머리를 살살 흔들었다. 이마를 간지럽히는 감각과 방안을 차분히 채운 ASMR영상의 소리에 맞춰 내려오는 눈꺼풀이 기꺼웠다. 그래, 이게 휴식이지.

 

-벌컥

 

 

“우리 조카~! 이모 안 보고 싶었어?”

 

 

그리고 타샤의 방문으로 그의 휴식은 하루도 가지 못했다.

 

학교 근처에 위치한 카페를 운영하는 그녀는 오랜만에 만난 알베르에게 대뜸 아르바이트를 제안했다.

 

 

“아직 개학까지 시간도 있고, 너 쉰다고 해도 며칠 못가 일 벌이고 다닐 거 다 아니까 가게에 나와.”

 

“아니, 아무 것도 안 하고 쉴 거라니까.”

 

“네가? 퍽이나.”

 

 

자신이 절대 믿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시간을 보내겠다는 알베르의 말이라며 입술을 비틀어 웃어보였다.

 

 

“말이 졸업 전 휴양 겸 세계여행이지... 너 거기서도 부탁해오는 족족 다 돕고 다녔다며.”

 

“별로 힘든 것도 아니고.”

 

 

보고 있던 자신이 갑갑해 나섰다는 사실은 입에 머금은 커피와 함께 삼켜버리고 시큰둥하게 타샤를 바라보았다. 마주친 그녀의 눈동자에 제대로 쉬지 않는 알베르를 향한 걱정이 담긴 것을 발견한 그는 휴식을 방해받아 뚱해져 있던 표정을 조금 풀었다.

 

 

“일손이 부족한 거라면 도울게.”

 

“그런 게 아니라니까.”

 

“정말 조용히 쉬고 싶어서 그래. 학교 근처라 아는 사람과 마주칠 가능성도 높고, 그렇게 되면 여기저기서 찾아와 시끄러워질게 분명해. 그리고 이모네 카페는 이 근처에서 유명하잖아. 방학이라고 손님이 적을 리도 없고.”

 

“학기만큼은 아니야. 시원한 에어컨 아래 편하게 앉아서 돈도 벌고 얼마나 좋니.”

 

“다들 일 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앉아 있어?”

 

“누가 놀기만 하라니? 주문받고 서빙하고 테이블정리만 해. 가끔 손이 부족할 때 설거지 도와주면 좋아할걸? 음료랑 디저트는 우리 유능한 전문가들이 있으니까 괜히 손대지 말고.”

 

“...하아.”

 

“그리고 돈은 이모가 인심 쓴다. 이정도면 어때?”

 

 

눈앞에 내밀어진 휴대폰 위의 숫자를 확인한 알베르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맨 앞의 숫자에 이어 쓰여 있는 0의 개수가 생각보다 많았다. 그냥 봐도 알 수 있는 금액을 한자리씩 세어가며 확인한 알베르는 저울이 점점 기우는 것을 느끼곤 곤란함과 묘한 즐거움에 턱을 쓸었다. 이 금액이면 여행 동안 비어버린 잔고를 어느 정도 메꿔 넣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알베르의 마음을 눈치 챈 타샤가 일에 지장만 주지 않는다면 원하는 대로 편하게 있어도 된다며 다시 한 번 못을 박았고 알베르는 못 이기는 척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알베르는 예정에도 없던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

 

 

 

일을 시작하고 일주일, 알베르가 할 일이라곤 타샤가 말한 대로 주문, 서빙, 계산, 뒷정리를 하는 것이 다였다. 거기에 비가 오는 날이 많아질수록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항상 바쁘게 움직이는 생활을 해오던 알베르는 가만히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자 지루함에 몸이 근질거려 가만히 있질 못했다. 여기저기 살피며 다른 일이라도 하려고 하면 어디선가 직원들이 나와선 알베르를 말렸다. 마치 아이를 달래듯 그의 손에 음료를 한 잔 쥐어주고 카운터에 마련해둔 의자에 앉혔다. 아연하게 그들을 올려다보자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알베르는 가장 막내로 보이는 직원을 붙잡고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다정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타샤의 조카이기 전에 같이 돈 받고 일하는 입장인데 일을 나눠하면 얼마나 좋겠냐며 살살 달랬다. 곤란한 표정으로 알베르와 동료들의 눈치를 보던 그가 어물거리던 입을 열었다.

 

알베르는 빨대를 잘근잘근 씹으며 그들이 손에 쥐어준 프라푸치노를 빨아들였다. 정해진 일 외에 다른 일을 하거든 좀 말려달라는 부탁과 함께 상여금을 주기로 했다는 말에 알베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같이 가게에 있는데 시간이 남으면 일 좀 도울 수도 있는 거지! 모든 것이 불만스러웠지만 그들을 탓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볼품없어진 빨대를 버리고 잔을 들어 벌컥 들이켰다. 입안을 가득 채운 달콤함과 목을 타고 내려가는 시원함으로 갑갑한 속을 달랬다. 아무래도 시간을 죽일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

 

 

 

유독 심하게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인지 출근길에 잠시 스쳐 지나간 손님들 이외엔 빈 자리를 채우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 어디 한번 편하게 쉬어보자. 알베르는 비어있는 공간에 잔잔히 울리는 음악을 따라 흥얼거리며 책의 페이지를 천천히 넘겼다. 종이가 몇 번 팔랑거리고 이야기가 새로운 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열린 문틈사이로 시끄럽게 울리는 빗소리와 함께 손님이 찾아왔다.

 

 

“어서오세요-”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짙은 비구름의 그림자를 담은 것처럼 새까만 우산.

그와 반대로 곧 찾아올 여름의 태양처럼 강렬한 붉은 머리카락.

아름다운 선으로 그려진 이목구비 속에 자리 잡은 암갈색 눈동자는 한낮의 열기가 남아있는 일몰시(日沒時)의 서늘한 달을 떠올리게 했다.

 

알베르의 인사에 답하듯 짧은 눈인사를 보낸 그는 주위에 비어있는 의자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밖이 가장 잘 보이는 창가의 테이블로 물 흐르듯 걸어갔다. 마치 그를 위해 준비되었던 것 마냥 알맞은 크기의 폭신한 의자에 편하게 기대어 앉고선 비바람에 축축해진 외투를 벗어 옆 의자에 툭 걸쳤다.

 

그런 그를 미묘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알베르는 잠에서 깨듯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곧바로 메뉴판을 챙겨 발을 옮기던 알베르는 다시 돌아가 직원들을 위해 준비해둔 마른 수건을 챙겼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던 남자는 테이블 위로 늘어지는 그림자와 점점 가까워지는 알베르의 기척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무슨 용건이라도 있냐는, 경계하는 고양이와 같은 눈빛에 알베르는 침착하게 미소를 지으며 수건을 내밀었다. 수건과 알베르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남자는 짧은 감사인사와 함께 수건을 받아들었다. 여전히 제 앞에 서있는 알베르를 보며 뭔가 더 남았냐며 눈썹을 까딱이는 그를 향해 조금 더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조금 있다가 다시 올 테니 천천히 고르세요.”

 

“아.”

 

‘...아?’

 

그의 알 수 없는 반응에 잘 유지하고 있던 미소에 살짝 금이 갔다. 빠르게 표정을 가다듬고 메뉴판을 펼쳐 그의 앞에 놓아주었다. 그는 아주 짧은 순간이었음에도 알베르의 표정변화를 눈치 챈 것 같았다. 무엇이 즐거운지 그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알베르 못지않은 화사한 미소와 함께 경쾌하게 메뉴판을 덮었다. 그 행동에 알베르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남자는 그것을 못 본 척 느긋하게 책을 꺼내 테이블위에 올려놓곤 등을 곧게 펴 앉았다.

 

 

“아메리카노, 홍차, 레몬티 순서로 2시간 마다 한잔씩 주시면 됩니다.”

-항상 이 순서니까 잊지 마시고요, 신입 직원님.

 

 

알베르는 그의 상냥한 목소리와 미소에 담긴 뒷말을 눈치 채고 입술을 최대한 끌어당겨 웃어보였다.

 

 

“기억해두죠.”

 

 

카운터로 돌아온 알베르는 포스기에 주문 내역을 누르며 인상을 살풋 찡그리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누르기를 반복했다.

 

잠시 후 자신이 다가간 줄도 모르고 이야기 속에 깊이 빠져있는 그의 앞에 커피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주위를 맴도는 고소한 향을 따라 시선이 옮겨지고 하얗게 올라오는 따뜻함을 발견한 그의 눈꼬리가 살짝 휘어졌다.

 

 

“감사합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알베르와 눈을 맞춰 감사를 표하고 양손으로 잔을 감싸 쥐었다. 비에 젖어 추웠던 걸까. 그제야 그의 새하얀 손에 분홍빛이 감도는 것이 보였다. 얼굴에 은은히 감도는 미소를 보고 말없이 제자리로 돌아온 알베르는 에어컨의 온도를 조금 올리고 의자에 앉아 읽다 만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글 한 줄에 시선 한 번. 자신의 얼굴에도 그와 닮은 미소가 맴돌고 있는 줄도 모른 채 페이지를 넘겼다.

 

새로운 사건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알베르의 비와 함께하던 지루한 시간이 비와 함께 찾아오는 그 남자 덕분에 조금 즐거워졌다. 한 단어로 정의하기 힘든 묘한 남자를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좇다 보면 어느새 시곗바늘이 반대편으로 넘어가 있었다. 그가 창밖을 내다볼 때면 알베르는 카운터 너머로 그를 바라보았고, 그가 책을 읽을 때면 자신도 책을 읽었다.

 

레몬청이 투명한 유리잔을 노랗게 물들이며 우러나고 있을 때, 잠깐 가게에 들른 타샤가 알베르에게 짧은 손인사만 보내곤 통통 튀는 발걸음으로 남자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네요~ 장마가 시작되기 전 비오는 날 봤으니 딱 3주 만인가?”

 

“오랜만입니다. 여긴 여전히 조용하네요.”

 

“이런 날씨에만 찾아오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평소엔 손님 많다고?”

 

“압니다. 그래도 이런 날이 조용해서 좋으니까요.”

 

 

좋은 가게를 독차지한 것처럼 느껴지고. 덤덤한 목소리로 지나가듯 기분 좋은 말을 흘린 그는 무심하게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타샤는 그런 행동이 귀엽다는 듯 히죽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금방 차 가져다 줄게요.”

 

 

대답 없이 고개만 아래위로 살짝 흔들렸다. 그런 그의 대답이 익숙하다는 듯 몸을 돌린 타샤와 눈이 마주친 알베르는 그가 눈치 채지 못하게 소리 없이 손짓을 했다. 알베르의 행동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다가온 타샤의 팔을 잡아당겼다. 알베르가 원하는 대로 몸을 숙여준 그녀의 귓가에 다가가 속삭였다.

 

 

“잘 아는 사이야?”

 

“아, 우리 가게 특별한 단골손님.”

 

“특별한?”

 

 

단골손님이면 단골손님이지 특별할건 뭐가 있지? 알베르의 찌푸려진 미간과 달리 눈동자는 답을 빨리 듣고 싶어 안달하는 아이처럼 반짝였다. 어릴 적과 쏙 닮은 모습에 가슴이 찡해진 타샤는 일부러 뜸을 들이다 알베르의 재촉이 짜증이 되기 직전에 대답을 들려주었다.

 

 

“여기에 카페를 연 이후로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만 찾아오는 손님이거든.”

 

 

메뉴는 언제나 동일. 방문 시간도, 머무는 시간도, 머무는 자리도 동일. 그에게 관심을 가졌던 몇 직원들이 말을 걸어본 적도 있었지만 간단한 대답은 해주어도 대화가 이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나. 유일하게 대화라고 할 수 있는 말들을 그와 주고받은 타샤가 자랑하듯 가슴을 쭉 폈다. 이후 직원들 사이에선 게임 속의 히든캐릭터 같은 존재가 되었고, 이름조차 물어보지 못한 그들은 결제 사인의 KH에서 따와 K라고 부른다고 했다.

 

 

“K...”

 

 

카이(Kai), 케빈(Kevin), 케이드(Kade), 녹스(Knox), 켄드릭(Kendrick)...

 

K로 시작하는 이름들을 하나씩 떠올리는 사이 레몬티가 가장 맛있는 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

 

 

 

며칠간 지켜본 K는 나른하고 서늘한 인상과 언제나 무표정할 것 같은 분위기와는 조금 달랐다. 하얀 도화지 위에 다양한 표정들이 그려지는 것이 일기(日氣)가 가득한 초여름을 닮아있었다. 창밖을 내다볼 때 긴장감 없이 풀어진 얼굴, 책의 내용에 따라 조금씩 움직이는 눈썹과 눈꼬리, 노트북 키보드의 딸각거림 한 번에 찾아오는 고심과 또 한 번의 딸각거림에 찾아오는 평온. 가끔 귓가에 속삭이듯 조용히 통화를 하던 그가 보기 드문 미소를 지을 때면 알베르는 수화기 너머의 상대가 누구일지 상상해보곤 했다. 가족? 친구? 아니면 연인? 누군지 몰라도 그를 미소 짓게 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가까운 사이겠지.

 

왠지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었다.

 

 

 

***

 

 

 

따뜻하게 데워진 잔 위로 찻주전자를 기울였다. 백색의 도자기에 금잔화가 활짝 피듯 물결을 일으키며 가득 채워지자 종이에 휘감겨있던 그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빠져나와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펼쳐져 있는 페이지가 덮이지 않도록 누르고 있는 손 틈 사이로 까만 문장들이 흘러나와 알베르의 눈에 담겼다.

 

 

『완전히 소탕하여라. 이제는

나의 모든 원수가 내 자비 하에 들어왔다.

이제 곧 나의 일이 모두 끝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넌 자유의 몸으로 공기를 마시게 된다.

잠시 동안만 나를 따르며 시중을 들어라.』

 

 

“「템페스트」를 읽고 계신가 보군요.”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안 읽을 것 같았는데.

 

 

짧은 시간동안 이 자리에서 그가 읽어 내린 책의 수는 열손가락에 다 담지 못했다. 알베르는 그의 옆을 오다니며 봐온 책의 제목들을 찬찬히 떠올려 보았다. 동시에 그가 책을 덮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책들이 가장 앞에 나열되었다. 그 중 비슷한 사건으로 시작되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 끝이 달랐다.

 

홀로 생각의 늪에 잠긴 알베르의 시선이 책 위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알베르의 시선을 끊어내듯 책 위의 손가락이 톡톡 두드려졌다. 그 소리를 신호로 알베르가 늪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알베르의 생각을 꿰뚫어보듯 그의 가늘어진 눈이 맑은 물빛 한가운데 자리한 심해를 들여다보았다. 마주한 눈동자 속에 비춰진 서로의 모습이 마치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배 한가운데에서부터 온 몸을 휘감는 묘한 느낌에 알베르의 눈꺼풀이 움찔거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와 같은 나른한 얼굴로 돌아온 그의 시선이 책 위로 옮겨졌다. 그가 종이위의 글자를 손끝으로 읽듯 매끄럽게 쓸었다.

 

 

“책을 좋아해서요. 가리지 않고 읽는 편입니다.”

-그런 당신도 이런 이야기는 취향이 아니지 않나요?

 

 

쉽게 사라지지 않던 묘한 느낌은 이제 간질거림으로 바뀌어 심장이 찌르르 떨려왔다. 비오는 날에 잘 어울리는 왕자님(프린스 오브 웨일즈)이 담긴 찻잔을 그에게 내밀며 즐거움을 숨기지 않는 목소리로 능청스럽게 책의 한 구절을 읊었다.

 

 

“그를 너무 성급히 판단하지 마세요.”

 

 

 

***

 

 

 

K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가 따로 부탁한 레몬에이드를 준비해 가져다놓았다. 깨끗하게 비운 찻잔을 트레이 위에 올려놓으며 들쑥날쑥 쌓여 있는 책들을 살폈다. 장편 소설로 보이는 책의 새까만 표지에는 세상의 모든 어둠이 얼룩져 만들어진 것 같은 소년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소년의 머리 위에 세워진 칼날처럼 써져 있는 제목을 속으로 되새기며 카운터로 돌아온 알베르는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영웅의 탄생」... 판타지 소설인가.’

 

 

짧게 써진 줄거리와 몇몇 후기를 확인한 알베르는 흔한 영웅소설 서사의 따분함에 망설임 없이 어플을 종료시켰다. 자신의 손으로 고르고, 자신의 돈을 주고 사 읽을 일은 절대 없을 것 같은 책이었다.

 

다음날, 서점을 빠져나오는 알베르의 양 손에 묵직한 종이봉투가 쥐어져 있었다.

 

 

 

***

 

 

 

비가 오지 않는 날의 카페는 귀가 아플 정도로 소음이 가득했다. 소음의 크기만큼 분주하던 가게도 늦은 저녁시간이 되어서야 진정되었다. 식사를 챙겨먹을 입맛도 뚝 떨어질 정도로 바쁘게 움직인 알베르는 겨우 얻은 휴식시간에 의자에 몸이 녹아내리듯 늘어뜨려 앉았다. 제 손안에 놓인 무게의 제목을 눈으로 읽어 내리고 K가 매번 앉는 창가 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이걸 왜 읽고 있는 건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의문을 한숨으로 흘러 보내고 책을 펼쳐들었다.

 

빠른 속도로 울리던 종이 소리가 다음 권으로 넘어갈수록 느려졌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속이 갑갑해져 왔다.

 

작가의 필력은 좋았다. 몰입감이 뛰어난 전개에 눈을 뗄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소재가 최악이었다.

 

끝없이 희생되고, 희생시키고, 희생당하고.

죽고, 죽고, 죽고.

절망, 절망, 절망.

그리고 주인공은 점차 강해져 갔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영웅이 되지 못했다.

 

다음날 읽은 권에도, 그 다음날 읽은 권에도.

 

무언가 반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신중하게 문장을 소화시켜나갔다.

 

 

“읽을 만한가요?”

 

 

알베르의 고개 너머로 빗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자 카운터 앞에 선 K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먼저 말을 거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알베르의 눈이 놀란 토끼처럼 커졌다. 알베르의 반응이 우스운지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허둥거리며 책을 덮은 알베르가 뒤늦게 질문을 떠올리고 그렇다고 말하려는 찰라 그의 입이 먼저 열렸다. 처음부터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마음에 안 든다고 얼굴에 쓰여 있네요.”

 

“...그런가요.”

 

 

머쓱함에 목 뒤를 주무르며 표지 위의 숫자를 확인했다. 꽤 많이 읽었다고 생각했음에도 아직 10권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알베르는 예상 외로 그가 이 책을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를 빠르게 굴려 말을 골라냈다. 그래도 진행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꽤 흥미로운 전개라고. 그런 알베르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그가 카운터 위에 빈 잔을 내려놓았다.

 

 

“그렇죠. 하지만 그 책, 저도 싫어합니다. 아마 당신과 같은 이유일거라 생각해요.”

 

 

당신과 같은 이유.

 

그 말에 긴장이 탁 풀렸다. 억지로 말을 꾸며내지 않아도 된다는, 솔직해도 괜찮다는 허락을 받은 것만 같았다. 알베르는 천천히 자신이 읽으면서 느낀 그대로 그에게 들려주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평화를 얻는 이야기.”

 

“끝없는 절망으로 강해지는 이야기.”

 

“진부하고 재미없기 이전에 옳지 않아.”

 

“그게 이야기일 뿐이라도 말이죠.”

 

 

마치 한 사람이 말하듯 대화를 주고받은 그들은 알 수 없는 오묘함과 흥미로움을 느꼈다. 당신의 생각은 마치 내 생각을 읽고 있는 것 같아.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우연의 연속인걸까. 상대를 조금이라도 더 알아내기 위해 그 속을 파헤치듯 들여다보았다. 밖의 빗소리와 스피커에서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가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해 대화를 주고받듯 어우러졌다. 피아노의 여음이 사라지고 통기타 현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집요하던 시선이 거두어졌다. 여운을 지워내듯 무겁게 눈을 감았다 뜬 K가 알베르를 향해 빈 잔을 밀었다.

 

 

“커피, 리필하고 싶은데.”

 

 

알베르는 진한 아메리카노를 가져다주자 말자 물마시듯 비워내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빈 잔을 집어 들었다. 아직 그가 온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시간. 평소였으면, 다른 사람이었다면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온 신경과 괜한 걱정이 그에게 상관하고 싶다고 날뛰었다. 안 돼. 가만히 있어, 알베르 크로스만.

 

 

“라떼로 가져다드릴게요.”

-속도 생각하면서 마셔요.

 

 

아차 싶었다. 자신의 입을 때리고 싶은 것을 잔의 손잡이를 꽉 잡는 것으로 대신했다. 어떤 부정의 화살이 날아와도 피하지 않을 생각으로 기다렸다. 그는 잠시간 미간을 찌푸린 채 알베르가 들고 있는 잔을 노려보고 있었다. 알베르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본 그가 말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이곤 몸을 휙 돌렸다. 그 순간 타샤와 대화를 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행동이 낮선 이의 호의에 대한 쑥스러움이자 무언의 긍정임을 알아챈 알베르는 자꾸만 빠져나올 것 같은 바보 같은 웃음을 꾹 참았다.

 

 

“대답 안 해주시나요?”

 

 

알베르의 질문에 옮기던 발걸음이 멈칫하더니 고개가 살짝 돌아왔다. 입술이 몇 번 우물거리더니 약간의 한숨과 함께 작은 목소리가 알베르의 귀에 들어왔다.

 

 

“...그래요.”

 

 

그러곤 아주 빠르게 발을 옮겨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아무 일 없었다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는 모습에 알베르는 결국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바리스타에게 새로운 주문을 알리고 자리로 돌아온 알베르의 얼굴은 한결 편해보였다. 다시 책을 집어든 책은 펼치지 않고 가방 속에 던지듯 집어넣었다. 주위에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던 사람이 있다면 전부 줘 버릴 생각을 하며 그에게 가져다 줄 커피가 준비되길 기다렸다.

 

 

 

***

 

 

 

두 사람은 남보다는 가깝지만 친구와는 뭔가 다른, 한가지로 정의하지 못한 관계 속에 팔을 뻗으면 아슬하게 닿을 것 같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서있었다.

 

K의 테이블의 공간을 채우는 것들이 늘어났다. 그의 의견이 반영된 것은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취향에 맞추려 애를 쓴 것이 보이는 음료들과 그에 어울리는 디저트들이 함께 올라왔다. 그럼에도 영수증 위에 써진 금액엔 전혀 변화가 없었으니 전부 알베르의 지갑에서 나왔다는 것 정도는 금방 눈치 챌 수 있었다. K는 충분히 거절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그것을 받아먹고, 알베르를 지켜보고, 손님이 없을 때면 자신의 앞에 앉혀두고 말동무 삼았다.

 

알베르도 그의 행동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멀리서 바라보던 그를 맞은편에 앉아 거리낌 없이 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달달한 디저트를 먹을 때면 느슨하게 풀리는 눈꼬리를 볼 수 있었고, 창밖을 내다보며 아주 작은 소리로 흥얼거리는 콧노래를 들을 수 있었고, 책을 읽을 때면 손가락에 얽힌 종이를 살살 문지르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연히 시선이 마주치면 눈은 피하지 않으면서 살짝 내려가는 고개도, 읽고 있는 책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을 때면 날카로워지는 눈매도,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귀 뒤로 넘기는 얇고 긴 손가락도 마음에 들었다.

 

알베르가 마지막 장을 넘기고 여운을 느끼며 책을 내려놓자 일정하게 울리던 타자 소리가 뚝 끊겼다. 조금 멍하니 표지를 내려다보던 고개를 들어 올리자 조명 아래 붉은 빛이 조금 짙어진 눈동자에 흡족함이 가득 담겨 있는 것이 보였다. 이번에도 얼굴에 티가 난 걸까. 다른 사람들은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신을 그가 알아볼 때면 화려한 가면이 그의 손에 벗겨져 민낯을 전부 내보이는 느낌이 생소해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자신의 앞에 놓인 푸른색 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대 얼굴을 숨겼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하는 알베르의 주위로 웃음소리가 맴돌았다. 소리에 이끌리듯 푸른 유리구슬이 굴러 붉은 유리구슬에 맞닿았다. 알베르가 들은 나긋한 웃음소리는 환각이었던 것인지 그의 얼굴은 평소와 같이 나른했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덤덤했다.

 

 

“이번에는 마음에 드셨나요?”

 

“네. 재밌네요. 잘 읽었습니다.”

 

 

그에게 책을 돌려주자 곧바로 새로운 책을 꺼내 알베르에게 건네주었다.

 

 

“그 작가의 신작이에요. 이틀 뒤 비가 온다고 했으니 그 때 돌려주세요.”

 

 

그가 빌려준 책을 자신이 마음에 들어 할 것을 예상하고 같은 작가의 소설을 챙겨 왔다는 사실에 알베르의 얼굴이 느슨하게 풀렸다. 꾸밈없이 휘어진 푸른 초승달이 그에게 감사인사를 보냈다. 화답하듯 싱긋 웃어 보이고 노트북화면을 내려다보는 그의 볼에 약한 홍조가 돌았지만 들뜬 마음으로 책을 펼쳐보던 알베르는 그 분홍빛 꽃을 보지 못했다.

 

 

 

***

 

 

 

유례없이 길었던 장마가 끝나고 이번엔 모든 것을 녹여버릴 열기를 퍼붓는 더위가 시작되었다. 비오는 날 역시 여름날의 열기에 녹아 사라져버렸다. 달력위에 남아있는 여름의 숫자는 한 바닥 조금 넘게 차지했지만 알베르가 그를 만날 수 있는 날은 아무리 세어 봐도 양손의 손가락을 다 채우지 못했다. 여름이 흘러갈수록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더 빠르게 지나갔고, 그가 돌아가고 혼자 자리에 앉아있을 때면 애틋한 여운이 함께했다. 지겨운 시간의 상징과 같았던 비가 일기예보를 매일 확인해가며 기다리는 그리움으로 변했다.

 

새로운 학기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카페에서의 하루도 7번 남았다. 비척거리며 일어난 알베르의 눈에 창밖으로 보이는 잿빛의 세상과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이 비쳤다. 메마른 땅이 단비에 젖어가듯 얼굴에 생기가 돌고 폭풍우 치는 바다와 같던 눈동자가 햇살 좋은 날의 바다와 같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는 소풍날 아침의 아이처럼 들떠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카페에는 손님이 없었다. 하지만 알베르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카페가 좋았다. 잠시 후 빗소리와 함께 들어올 그와 마주보고 앉아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까. 자리에 앉아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던 알베르는 새삼 자신의 행동에 어색함을 느꼈다. 마치 「어린 왕자」 속의 사막여우가 된 것 같았다. 비와 관련된 것들을 볼 때면 자연스럽게 붉은 머리카락이 떠올랐고, 그가 찾아올 시간이 다가올수록 점점 행복해졌다. 만약 원래 오던 시간보다 조금 늦어질 때면 안절부절 못하며 시계의 초침을 세고, 창밖을 내다보는 자신이 있었다. 그에게 길들여져 가고 있었나.

 

 

‘아니.’

 

 

오히려 자신을 길들여달라는 듯 그에게 다가갔다. 그렇다면 왜? 그의 이름도, 나이도,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그는 비오는 날 조용한 카페에서 시간보내기를 즐기는 손님일 뿐이고, 자신은 여름이라는 한 계절 동안 카페에서 일하는 단기간 아르바이트생일 뿐이었다. 이 공간과 시간에, 평범했을 일상에 발을 들인 것은 그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알베르는 확실한 것이 좋았다. 모든 계산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것이 좋았고, 모든 인간관계가 정해진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좋았고, 모든 상황을 통제 가능한 범위 안에 두는 것이 좋았다. 명확하지 않은 것들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그로 인해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렇기에 알베르는 자신의 감정을 확실히 해야 했다.

 

나는 그에게 관심이 있다. 그 관심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선지 오래였고, 자신은 그의 아주 작은 습관이나 사소한 일상까지 궁금했다.

 

나는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고, 그와 시간을 공유할 때면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이 이렇게 설레고 기대되는 일인가 생각될 정도로 즐거웠다.

 

나는 끊임없이 그를 떠올렸다. 비가 오는 날이면 그가 생각나던 것이 점점 커져서 커피 향에 그가 떠오르고, 책장 넘기는 소리에 그가 보고 싶고, 맑은 하늘을 보면 그가 그리웠다.

 

그와 대화하는 것이 즐거웠고, 그의 표정과 행동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고, 그가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 싫지 않았다.

 

나는 그의 일상이 되고 싶었다.

나는 그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가 되고 싶었다.

 

나는 그를-.

 

 

종이 울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쏟아지는 빗속에 진회색의 세상과 어우러지는 새까만 우산.

끝이 다가오는 여름의 태양이 만들어내는 노을을 담은 붉은 머리카락.

짙은 암갈색 눈동자는 한낮의 열기가 남아있는 일몰시(日沒時)의 따뜻한 달을 떠올리게 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가 심장을 두드렸다.

 

주위의 자리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그가 알베르에게 짧은 눈빛을 보내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몇 번이고 봐온, 아무도 없으니 편하게 오라는 의미의 행동이 온 몸을 뻣뻣하게 만들었다. 마주보고 앉아 짧게 주고받는 대화에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았다.

 

알베르는 아무렇지 않은 척 책에 시선을 두고 있었지만 하얀 것은 종이요, 까만 것은 글자였다.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채 수동적으로 까만 것들을 눈으로 찍어내고 기계적으로 종이를 넘겼다. 그런 알베르를 잠시간 지켜보던 K는 모르는 척 고개를 내렸다.

 

창밖의 비가 잦아들고 구름사이로 붉은 빛이 내려와 그들이 앉은 자리를 물들일 때, 그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자신의 물건들을 하나씩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그제야 그가 돌아갈 시간이 되었음을 깨달은 알베르의 얼굴에 당혹스러움과 아쉬움이 차올랐다. 일주일의 시간이 남아있었지만 그 사이 비가 올까. 만약 오지 않는다면 이것이 마지막 만남일지도 몰랐다. 비가 오는 날, 이 카페를 찾아온다면 그를 만날 수 있을 테지만 그가 원치 않을지도 모르니까.

 

의자로 바닥을 긁는 소리가 고뇌 속에 허우적거리는 알베르를 현실로 끄집어냈다. 머리 위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였다.

 

 

“그럼 이만.”

 

“잠시만.”

 

 

알베르의 부름에 바닥에서 떨어졌던 발이 다시 원래자리로 돌아갔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알베르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의 감정을 가면보다 더 깊은 곳에 숨기고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그의 굳은 표정과 눈빛이 첫날 보았던 서늘함을 닮아있었다. 자신이 뭔가 실수라도 한 걸까. 자꾸만 내려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꽉 막힌 목구멍에서 목소리를 뱉어냈다.

 

 

“이번 주가 제 마지막 근무인데 아무래도 한동안 비가 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게 싫어. 당신을 계속 만나고 싶어.’

 

 

뒷말은 빌딩들 사이로 숨어드는 태양을 따라 사라졌다. 그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들과 작별하기 위해 마지막 악수를 건넸다.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얇은 틈 사이로 보이는 암갈색의 달이 알베르의 손과 입매, 눈을 찬찬히 담더니 잔잔하게 울었다.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지 않을까

그러면 널 붙잡을 수 있을 텐데.” ⃰

 

 

알베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타국의 언어로 써진 편지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 날 이후 비는 오지 않았다.

 

 

 

***

 

 

 

1년 만에 돌아온 학교생활은 정신이 빠질 정도로 바빴다. 아직 졸업하지 않은 동기나 선배, 후배들에 교수님들까지 알베르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등교 전 짧은 시간부터 식사시간, 공강 시간, 수업이 끝나고 모든 시간들이 촘촘하게 약속들로 매워졌고 많은 만남들을 해결하고 여유가 생겼을 쯤엔 여름날의 더위도 끝을 보이고 있었다.

 

알베르는 강의에 집중할 수 없었다. 피곤함과 지루함에 생각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노트 한 구석에 글자를 꾹꾹 눌러썼다. 그 편지의 언어를 읽을 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그가 대신 남겨놓은 것 같았다. 아무 말도 못하는 저의 마음을 날것의 상태로 끌어내놓은 것 같았다. 마침표 위를 몇 번이고 볼펜으로 쿡쿡 눌러 찍었다. 가슴이 따끔거렸다.

 

옆에 앉아 있던 동기가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 알베르의 눈치를 보다 노트 위의 글을 발견하곤 고개를 뻗어 속삭였다.

 

 

“오, 나 이거 본 적 있어. 너 이런 것도 아냐?”

 

“아니, 누가 알려줘서. 그런 넌 어떻게 알아.”

 

“저번 학기에 교양 학점 채운다고 들은 강의에서 봤거든. 고전 시가 같은 건데 이거 뒤에 답가도 있을걸.”

 

“답가? 혹시 기억해?”

 

“그럴 리가 있냐. 저것도 네가 써둬서 알아 본거지 읊어보라 했으면 한 글자도 말 못했을걸.”

 

 

네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걸 다 기억하고 있는 놈은 너 정도 밖에 없을 거라며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시가 아니었음을 알았으니 후에 찾아보면 되겠지- 하고 수업에 집중하기 위해 고개를 들자 자신과 동기를 바라보고 있는 교수와 눈이 마주쳤다. 칠판을 향하는 고갯짓에 얼른 펜을 들어 책에 필기를 하자 옆에 놓여있던 휴대폰 상단에 파란 불빛이 깜빡였다.

 

 

→궁금하면 문예창작과 걔한테 가보는 건?

걔?←

 

 

알베르 크로스만이 모르는 사람이 있냐며 괴상한 표정을 짓더니 그가 복학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상기하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것을 내버려둔 채 수업을 듣고 있으니 한참을 걸려 빼곡하게 적인 문자가 왔다.

 

 

→신입생인데 별나기론 너만큼 별나서 너 없는 사이에 유명인사가 됐거든.

 

 

별나다는 말에 알베르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실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자 어깨를 으쓱거리며 계속 읽으라며 눈짓을 해왔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다시 눈을 돌려 마저 읽어 내려갔다.

 

 

→전공은 문예창작인데 자기가 듣고 싶은 강의가 있으면 어디든 도강하러 다니는 녀석. 그리고 너 학생회장할 때 학생들한테 찝쩍대는 미친개 있었잖아. 네가 움직여서 징계 받았던. 그 놈, 이번학기에 안 보이는 이유가 다 걔 덕분이잖아. 저번학기로 잘렸어. 그때 장난 아니었는데!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문예창작과 학생의 온갖 정보가 담긴 문자는 흥미로웠지만 워낙 과장해서 말하길 좋아하는 그였기에 다 읽었을 쯤엔 소설 한편을 본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정작 중요한 내용은 담겨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알베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수다가 언제나 과하다고.

 

 

그래서 어디가면 만날 수 있는데?←

→○○교수님 기초 경영학원론.

경영수업도 들어?←

→그랬잖아. 듣고 싶은 수업은 다 듣는다고.

 

 

과장이 아니라 그의 말대로 정말 별난 사람일지도. 이름이나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을 물으려 한참 화면을 두드리는데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크로스만하고 파인애플 머리.”

 

“예.”

 

“교수님 제 이름도 기억해주세요...”

 

“시끄러. 복학해서 오랜만에 얼굴 보는데 집중 좀 하자.”

 

“그렇지만 너무 지루합니다, 교수님!”

 

“나도. 15년을 수업했지만 진짜 재미없어.”

 

 

교수와 동기의 시답잖은 농담이 몇 번 오고가고 결국 수업할 분위기가 아님을 느낀 교수가 다음 수업을 기약하며 끝을 알렸다. 기쁨에 들뜬 목소리들이 교수를 향해 감사인사를 전하고 교실을 빠져나가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알베르는 마저 이야기를 듣기 위해 좋다고 뛰어나가는 동기를 붙잡았다.

 

 

“엉?”

 

“이름이든 뭐든 알려줘야 내가 찾아가지.”

 

“딱 보면 알걸? 엄청 눈에 띄는 붉은 머리에 피부는 하얗고, 가만히 있으면 좀 서늘해 보이는?”

 

 

한 사람의 얼굴이 그려졌다. 여름을 닮은, 비 오는 날의 그가 떠올랐다. 그저 비슷한 분위기의 비슷한 사람일지도 몰랐지만 알베르는 그 남자임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름은...뭐더라.....아, 케일. 케일 헤니투스.”

 

 

당신의 이름은 케일 헤니투스였구나.

 

동기를 와락 끌어안고 고맙다며 등을 몇 번 두드려주곤 빠르게 인문관으로 발을 옮겼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과 행동에 뒤에 덩그러니 남겨진 동기와 주위의 학생들이 멍하니 알베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런 건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그에게 답을 들려줄 수 있다는 사실에, 그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기쁨에 온 몸이 가벼워졌다. 그를 찾기 전, 알베르는 답가를 찾으러 나서기로 했다.

 

금빛의 해바라기가 자신의 태양을 찾아 활짝 폈다. 알베르는 뜨거운 여름으로 돌아갔다.

 

 

 

***

 

 

 

창밖을 보던 케일은 쏟아지는 빗줄기에 인상을 구겼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상할 정도로 세상이 어두워지더니 결국엔 예고에도 없던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소나기일거라 안일하게 넘겼는데 장장 3시간을 퍼붓고 있었다. 수업은 끝났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우산이 없었다. 다음 수업을 위해 강의실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피해 빠져나온 케일의 무거운 발이 건물 후문으로 향했다. 조용한 복도에 습기를 머금은 나무와 흙의 냄새가 맴돌았다. 한참을 걷다 창가에 놓인 의자를 발견한 케일은 망설임 없이 앉아 책을 꺼내들었다. 그의 머리카락을 닮은 레몬색의 따뜻한 차 한 잔을 그리워하며 빗방울이 얇아지길 기다렸다.

 

책의 한 장(章)이 끝날 무렵 빗소리가 조금 약해졌다. 이틈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책을 챙겨 넣고 후문 앞에 선 케일은 후드 점퍼 안으로 가방을 메고 옷을 단단히 여몄다. 머리가 젖지 않도록 후드를 깊게 둘러쓰고 밖으로 뛰어나가려는 찰나 머리 위로 하얀 그림자가 드리웠다. 천천히 돌린 눈동자에 낯익은 남자가 보였다.

 

여름날

비오는 날이면 보았던

태양을 닮은 눈부신 머리카락과

여름의 하늘만큼 푸른 눈동자

더위조차 잊게 만드는 산뜻한 눈웃음

그리고 그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고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당신이 붙잡아 주신다면 난 머무를 겁니다.” ⃰

 

 

알베르는 가만히 서 있는 케일에게 뻗어진 손이 후드를 조심스럽게 벗겼다. 흔들리는 암갈색 눈동자 속으로 케일의 대답이 보였다. 그가 자신의 말을 끄집어내었듯 이번엔 그의 대답을 자신이 끄집어내었다. 아, 당신은 이 말을 나에게 하고 싶었구나.

 

 

“찾느라 한참 걸렸네요. 제가 늦은 걸까요?”

 

“...아뇨. 훌륭하네요.”

 

 

알베르는 여전히 조금 멍해 보이는 케일의 헝클린 머리를 정리해주려 손을 뻗다 머뭇거리며 손을 슬며시 내렸다. 가까이 다가왔다 돌아가는 손에 정신을 차린 케일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말도 못하고, 눈도 못 마주친 채 온갖 문장과 단어를 머릿속에서 끄집어내던 알베르는 우선 그의 이름을 자신의 입에 담아보았다.

 

 

“음...헤니투스 군?”

 

“케일이라고 부르세요. 편하게 말하셔도 됩니다, 크로스만 선배.”

 

“날 알아?”

 

“유명하시던데요. 가만히 있어도 이야기가 들려오던걸요.”

 

 

귓가가 붉어지고 제 볼을 긁적이는 알베르의 모습은 수줍음 많은 소년을 닮아있었다. 케일은 부드럽게 혀를 굴려 알베르의 이름을 담았다.

 

 

“크로스만 선배.”

 

“알베르.”

 

“알베르 선배.”

 

“알베르.”

 

“...알베르.”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히죽 웃어 보이는 알베르에 기가 막혀 허어- 하고 실소했다.

 

 

“선배야 말로 절 어떻게 찾으셨어요?”

 

“네가 워낙 유명해야지.”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무리였나 보다.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는 소식이었지만 그래도 알베르가 자신을 찾아와 이렇게 답을 들려주었으니 오늘만큼은 괜찮았다. 케일은 팔을 뻗어 그날 잡지 않았던 그의 손에 손가락 끝을 조심스럽게 가져다댔다. 케일이 팔을 뻗을 때부터 몸에 힘이 들어가던 알베르는 그의 손이 닿자말자 움찔거렸다. 하지만 뿌리치지 않고 그의 손가락이 얽혀오는 것을 가만히 놓아두었다.

 

눈이 마주쳤다.

 

 

“비가 오는 날이면 카페를 가요.”

 

“하지만 비가 오지 않아도 카페에 와줬으면 좋겠어.”

 

“비가 오지 않아도 카페에 가려고요.”

 

“비가 오지 않아도 날 만나줬으면 좋겠어.”

 

“비가 오지 않아도 당신을 만나려고요.”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자꾸만 풀어지는 얼굴과 화끈거리는 귓가, 차츰 잦아드는 빗소리 대신 심장소리가 주위를 둘러쌓다. 케일의 머리 위에 씌워준 우산 아래로 알베르가 들어갔다.

 

그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서로 다른 온도가 있어서. 아주 작은 공간이지만 두 사람이 함께 있을 수 있어서. 그저 그것만으로 너무나 완벽했기에.

 

하얀 우산이 머무는 자리엔 다정한 차 향기와 담소가 넘실거렸다. 그 바람결에 책의 종이들이 흩날리고 펼쳐진 장엔 한 문장이 쓰여 있었다.

 

 

『비와 함께, 우리는 그렇게 다시 만났습니다.』

 

 

 

 

 

 

 

 

 

 

 

( ⃰ : 「만연집(万葉集)」 인용)

린린

@hwa__99

[ In the rain ]

__________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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