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캄캄한 도심의 밤, 한 남자가 방송국 출구에서 대기하는 차를 타고 조용히 건물을 떠난다. 저 멀리 보이는 고층건물의 전광판에 첫 회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아온 TV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다.
「시청자 여러분, 오늘도 ‘르네상스 아틀리에’를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덧 100회차를 맞이했네요. 마음 깊이 아쉽습니다만, 오늘 방송을 끝으로 본 프로그램은 종영됩니다. 그동안 응원해주시고 소중한 마음을 보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방송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차량에 탑승한 남자와 같은 얼굴이 방송화면에 클로즈업되고 있다. 전광판과는 대비되는 지친 안색과 서늘한 표정이 이상한 간극을 자아냈다. 검은색의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자동차는 도심의 외곽을 향했고 어두운 숲 깊은 곳에 있는 어떤 저택 앞에서 멈추었다. 그 저택은 누가 보아도 예술적이라 감탄할 만큼 멋진 외양을 가졌다. 문고리조차 섬세한 조각으로 장식된 현관의 옆에는 중세풍의 문패가 달려 있었다.
‘크로스만 家’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현관에 들어선 그를 사용인들이 나와 맞이했다.
그는 담백하게 웃으며 사용인들의 인사에 정중하지만 간결하게 답하고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이름은 알베르 크로스만.
천부적인 재능으로 대대로 예술계를 압도해온 크로스만 가문의 직계 혈족으로, 뛰어난 외모와 독창적인 회화 기법으로 촉망받는 화가이자 사회적으로 인지도가 높고 공식적으로 활동도 많이 하고 있어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예술가가 바로 그다. 물론 세상을 혼자 사는 것 같은 뛰어나다 못해 주위를 압도해버리는 외모도 그를 수식하는 것 중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실상은 메마른 어둠에 짓눌린 연약한 인간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집안의 어른들이나 다른 가족들과는 다르게 알베르 크로스만은 천재가 아니었다. 그의 재능은 만들어진 것. 따라서 그의 성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한 건 처음이 아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그의 세상도 넓어졌고 그만큼 보이는 것들도 많았다. 물론 그전부터 받아왔던 찬사들은 계속해서 그에게 주어졌지만, 알베르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마치 이것이 당연한 순리라고 누군가 일러주는 것처럼 깨달아버렸다. 알베르 크로스만에게 천부적인 재능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고.
훈련과 노력으로 간신히 유지해온 그의 예술은 머지않아 바닥을 보일 것이기에, 알베르는 현실을 알게 된 이후로 끊임없이 초조함과 싸워야만 했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낙담의 덩어리에 완전히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그래서 일부러 다양한 활동을 하며 정신을 분산시켰는지도 모르겠다.
천재들 사이에서 살아남기란 정말이지 스스로 목을 죄는 날들의 연속이다. 슬슬 한계가 닥쳐올 것을 뻔히 아는 알베르는 무언가 전환점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똑똑-
“아인입니다. 말씀하신 차를 가져왔습니다.”
“들어오게.”
“지난번에 찾으셨던 다만 프레르 사의 폴 베르지니입니다. 이번에는 수량을 넉넉히 구매해두었으니, 오래 즐기실 수 있을 거예요.”
“고맙네. 아, 이번 주에 새로 발행된 잡지만 가져다주고 퇴근해도 좋아.”
잠시 후 돌아온 그는 알베르에게 잡지를 건네고 조용히 방에서 나갔다. 팔랑거리며 얇은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리다가 갑자기 멎었다. 흠……여기가 적당하겠군. 알베르는 읽던 잡지를 덮고 탁자에 아무렇게나 올려둔 채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
바다 내음이 호흡기를 훅 파고들었다. 털갈이를 앞둔 양들이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것 마냥, 파란 하늘에 몽실한 솜털이 가득했다. 저 너머로 태양의 빛을 쫓아 반짝이는 물비늘이 눈부시게 밝았다.
“뭐……제법 마음에 드는군.” 알베르가 선글라스를 쓰며 나직하게 감상을 뱉었다.
그의 개인 별장은 높은 지대에 있어서 창문 너머를 볼 때면 자연이 그려낸 풍경화를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 자랑이었다. 아름다운 것을 눈에 담으며 가지는 티타임이란, 알베르의 오랜 취미이자 안식이다.
사실 충동적으로 휴식을 결정했기 때문에 그는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거실 소파에 누워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니 슬그머니 졸음이 몰려왔다. 굳이 저항할 필요가 없어 알베르는 천연덕스러운 객에게 기꺼이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홀로 머무는 별장은 바깥과 다른 시간이 흐르는 듯했다. 알베르는 슬슬 허리가 배기는 느낌이 들어 몸을 뒤척이다 껌벅거리며 눈을 떴다. 으음…… 지금이 몇 시지. 웅얼거리며 잠시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훅 몸을 일으켜 커튼을 걷었다. 태양이 머리 위로 떠서 제 열기를 사방에 뿌려댔다.
“벌써 한낮인가. 오래도 잤네.”
찌뿌둥한 몸을 풀면서 문득 이렇게 오랫동안 아무 생각 없이 자본 적이 꽤 옛날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은 잠이 들어도 숙면을 취하지 못했는데 말이야…… 그는 이것이 신기하기도 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지 싶어 꼬리를 물려는 의문을 잘라냈다.
토스트에 시리얼까지 간단하지만 배부르게 식사를 마쳤다. 배가 부르니 졸리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잤는데도 또 자고 싶어진 자신에게 감탄하며 졸음을 몰아낼 책을 꺼내 들었다.
“80일간의 세계 일주라. 다음엔 여행을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이야기에 몰입해서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니 어둑어둑해진 바다로부터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알베르는 책장을 덮고 하루의 마무리를 하나씩 시작했다.
눈이 감겨오면 잠자리에 들어서 햇살이 눈을 간지럽히면 깨어나고, 배가 고프면 그때그때 떠오르는 음식을 차려 먹고, 누군가의 삶에 빠져들어 그곳을 여행하고 싶다면 책을 읽고, 바다가 유난히 푸른 날이면 그를 만나러 가고.
그런 소소한 나날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아주 특별한 일상이 되어.
그렇게 하루가 가고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흘렀다. 알베르가 이곳에 머문 것도 곧 두 달을 채울 것이다.
누군가 말하기를, 노는 것도 매일 계속해서 하다 보면 지치고 힘들다고 했다. 처음에는 지금껏 누리지 못했던 소소하고 특별한 것들이 그의 공허를 채우고 특별한 무언가를 주었다.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언제부턴가 반복되는 일상이 무료하고 지치고 그를 가라앉게 했다. 이미 맛을 알아버린 탓인지 계속해서 처음 느꼈던 만족감이 생각났다. 금단증상이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마음 깊은 곳에 단단히 걸어둔 빗장을 뽑아냈다.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알베르는 차마 거역할 수 없어 캔버스를 꺼냈다. 이것을 다시 눈앞에 두고 앉아있으니 참 괜찮지가 않았다. 착잡한 기분에 입안 가득 씁쓸함이 느껴졌다. 분침이 부지런히 제 할 일을 했으나 그는 선 하나 긋지 못한 채 캔버스만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붓이 거칠게 내던져졌다. 창가에 가까이 가서 바깥세상을 보니, 탁 트인 파란 바다가 심란한 듯 시원하다. 참…… 묘한 꼴이 아닌가.
그냥, 왠지 모르게 의무감이 들어서 무언가에 이끌리듯 해변에 산책을 나섰다. 뜨거운 태양 아래 반짝이는 모래는 그가 걸음을 옮길 때면 바삭바삭 제 존재를 알렸다. 자못 따갑기까지 한 볕은 알베르의 이성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어딘가 멍한 기분은 일견 아득하기까지 하다.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시야에 하얀 비치파라솔이 들어왔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니 차를 음미하며 휴양을 즐기는 한 남성이 보였다. 하얗고 붉은 화려한 외양의 그 사람은 주변 풍경과 무척 잘 어울리는 나른한 분위기를 풍겼다. 눈을 한번 깜박이니 알베르는 그 사람의 발치 앞까지 다가서 있었다.
“어…… 나는 알베르 크로스만입니다.”
알베르는 자신이 황망한 기색을 흘리는 줄도 모르는 듯 냅다 이름부터 말했다. 그제야 그 붉은 남자가 알베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알베르와 붉은 남자가 정지된 시간 속에 마주했다.
“케일 헤니투스입니다.”
한 점의 동요도 없이 무성의하게 내뱉어진 이름.
그 순간 붉은 남자만이 홀로 세상으로부터 유리되었다.
***
우스꽝스러운 첫 만남은 갑작스레 그들에게 찾아와서는 다음으로 연결되는 우연을 빚어냈다. 그날의 그곳. 우연의 이름을 빌어다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각자의 평온한 일상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문득 떠오른 생각에 대한 감상 같은 것을 나누며 바닷가를 거닐거나 티타임을 가졌다. 서로 좋아하는 차와 커피도 비슷해서 종종 원두나 찻잎을 선물하기도 하고 없는 것끼리 교환하기도 했다.
어떤 날엔 케일의 권유를 받아 미술 전시회를 보러 갔다. 특유의 강렬한 터치가 인상적인 유화들을 보며 그와 대화하는 동안은 이상하게 편안했다. 여전히 껄끄럽고 괴롭고 그림 하나 그려내지 못하는 처지임에도 케일과 공유하는 예술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온갖 부정적인 것들은 자신의 붉음 속에 품어버린 것인지 모르겠으나, 케일을 거쳐서 전해져오는 예술은 좋은 것들 투성이다. 희한한 일이다. 아니지, 좋은데 좋은 만큼 무서운 일이다.
감정적인 부분 외에도 또 놀랄 만한 일이 있었다. 케일은 예술적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 심지어 전문적인 영역에 있어서도 말이다.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라든지 가족관계라든지 그런 종류의 이야기는 해준 적이 없어서 섣불리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함께 시간을 보낼 때 그의 손이나 옷차림 등으로 판단하건대 그는 예술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 아니었다. 편견이라면 편견일지 모르겠다 생각이 들었다. 예술가가 아니면 전문적인 부분들에도 조예가 깊을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로 조예가 깊은 사람은 그가 아는 한에는 없었다.
“케일씨 혹시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왜 그러신가요?”
“아, 그게, 오늘 이야기를 나누면서 단지 아는 게 많은 수준이 아니라 전문적으로 조예가 깊은 것 같아서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혹, 실례가 되었다면 미안합니다.”
“실례일 것까지야. 관심이 많다보니 자연스레 알게 된 것뿐입니다. 그쪽 일을 하지는 않고요.”
케일이 여상한 낯을 하고 알베르의 물음에 답했다. 알베르는 그런가 보다 생각하기엔 뭔가 풀리지 않은 의문이 남아있었다.
“알베르씨 무슨 일 있어요? 표정이 별로 좋지 않은데…….”
“아니요, 괜찮습니다. 가시죠.”
이런, 대화하는데 상대방에게 집중하지 못하다니 그간 엄격하게 받아온 교육이 부질없군. 그까짓 의문이야 나중에 고민해도 될 터. 알베르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케일과 대화를 이어갔다.
***
본인은 늘 아니라며 부정하지만, 케일의 주변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는 선하고 다정한 사람이라 말할 것이다. 그를 만난 지 반년도 안 된 자신조차 그렇게 생각하는데, 하물며 그를 오래 보아온 이들은 말할 필요도 없을 테지.
알베르는 교류를 거듭할 때마다 열쇠가 하나씩 요철을 맞추며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케일이 그것들을 전부 맞추고 들어와 알베르에게 온전히 닿게 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알베르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는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알베르.”
“응?”
“그리고 당신이 힘들어하는 일을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도 되지 못합니다. 그래도 함께 나누어 들어줄 수는 있습니다. 당신의 일을 같이 고민하고 싶어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케일에게 한 명의 사람으로서 호감을 느끼고 의지하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알베르는 케일에게 자신의 성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 무엇도 강제하지 않았고 어떤 물리력도 개입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가항력이었다. 복받치는 충동에 알베르는 더듬더듬 서두를 꺼냈다.
부모에게도, 그리고 친구라고 부르기는 하는 이들에게도 꺼내지 못했던 말이었다. 길다 하면 길고 짧다 하면 짧을지 모르는 이야기가 끝났다. 오랜 세월 묵혀두었던 그것은 날 것과 같은 생생함을 뿜어냈다. 초조한 침묵이 흐르고 알베르는 판결문을 기다리는 죄수라도 된 것처럼 긴장 가운데 케일의 반응을 기다렸다.
“많이 힘들었겠네요.”
“아…….”
“그동안 홀로 버티느라 수고했습니다. 정말 고생 많았어요.”
어쩌면 내가 듣고 싶었던 말만 골라서 해주는 건지. 이제는 흘릴 눈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는 네가 한 말의 무게를 알고 있을까. 소리 없이 계속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에 얼굴이 엉망진창이 된 것 같았지만 그건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주제에 함부로 위로의 말을 건네고 이해한다 말해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그런 재능이 없어도, 발전하지 못한다 해도 내 친우 알베르 크로스만은 대단하고 귀한 사람입니다. 그것만은 잊지 마시길.”
케일은 말을 맺으며 알베르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알베르는 왈칵 쏟아져 내리는 눈물이 버거워 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 잊지 않을게.”
알베르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뭉개진 발음으로 말했다. 문득 무언가 껍데기를 깨고 나오려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알베르는 안식이라곤 없었던 가련한 제 삶을 케일에게 털어놓으니, 이리저리 매듭지고 엉킨 실 뭉치가 풀어져 정리된 기분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누군가 들어주었다는 것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하물며 그를 경청한 이가 케일인데 그렇지 않을 리가 없다.
그날 이후, 케일은 더욱 세심하게 알베르를 대하지도 부러 평소처럼 대하려 하지도 않았다. 알베르가 본 그는 타고나기를 다감한 사람이었다. 어떤 쪽으로든 케일의 태도와 행동이 바뀌었다면 실망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그 시간을 담담히 흘려보낼 수 있도록 해주어서 네게 고맙고 또…… 고마워.
좋은 원두를 들여왔으니 한 번 맛보러 오라고 케일에게 초대를 받았다. 어차피 그림 그리는 것도 아직은 아무런 진척이 없었으니 내일 가겠다는 답신을 주었다. 알베르는 케일이 없는 일상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언제부터였지? 소리 없는 침략자는 그의 모든 것을 틀어쥔 지 오래였다. 그날도 선잠을 자고 말았다.
자는 둥 마는 둥 하다 보니 동이 트고, 햇살이 들어와 알베르가 일어나기를 종용했다. 피곤함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도 같았으나 케일과의 약속은 고작 자신의 두통 따위보다 우선되었다. 차가운 물을 마셔 신경 한구석에 통증을 밀어둔 채 현관을 나섰다.
케일 소유의 별장은 알베르가 머무는 곳과는 달리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숲에 둘러싸인 곳에 있어서 별장 자체가 하나의 정원처럼 느껴졌다. 그의 별장은 주인을 닮아 포근했다. 집사 론의 안내를 따라 걸어갈수록 달콤하고 화려한 꽃향기가 짙어지며 공간을 덮었다. 긴가민가하기는 한데…… 설마 그건가.
“이번 커피는 게이샤로군.”
“예, 맞습니다. 파나마 에스메랄다 게이샤죠. 알아보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론이 알베르의 말에 수긍했다.
“구하기 어려운 원두일 텐데, 케일이 수완이 좋은 집사를 두었군.”
“이건 최한이 구해온 것이니 그가 들어야 할 칭찬이지요. 상큼하면서도 밸런스 좋은 풍미에 부드럽고 여운 가득한 커피이다 보니 도련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종류입니다. 그래서 최한도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일 겁니다.”
“하긴 그가 케일을 위하는 마음이 깊어 보이긴 했네만.”
론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금세 케일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커피를 마시며 원두에 관한 이야기부터 대수롭지 않은 여러 화제를 거쳤다. 급한 연락을 받은 케일이 자리를 비운 사이 산책을 하며 기다릴까 하고 복도로 나섰다.
벽에는 그림이 몇 점 걸려 있었는데 같은 사람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으로 보였다. 알베르는 지나가다 그를 보고 인사하는 최한을 붙잡았다.
“최한, 혹…… 여기 있는 그림들은 전부 같은 화가의 것인가?”
“네, 전부 케일 님의 솜씨입니다. 작년부터 갑자기 관심이 생기셨다며 취미로 시작하셨죠.”
“뭐……? 잠깐, 아, 아닐세. 알려줘서 고맙네.”
“별말씀을요. 그럼.”
그림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알베르는 황망히 사용인을 찾아다녔다. 알베르는 급한 용무가 생겨 먼저 돌아가 봐야 한다고, 말없이 돌아가서 미안하다고 이후 연락하겠다고 케일에게 전해달라 부탁한 뒤 그 길로 별장을 뛰쳐나갔다.
숨은 한참 전에 골랐으나 침대에 걸터앉은 알베르의 손과 심장은 시간이 지나도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은 했지만, 천재들을 향한 자신의 열등감이 케일에게도 어김없이 고개를 들이밀고 그 손을 뻗어 나갔다.
예술과 관련된 대화를 나눌 때마다 느꼈던 기묘한 반감과 케일의 가볍게 흘리는 듯한 답변을 들었을 때의 위화감이 이제야 이해되었다. 알베르는 꽁꽁 감춰두었던 자신의 어두운 일면과 처음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피해자라고만 생각했던 자신의 처지가 단번에 역전되었다.
알베르는 케일에게 아무 연락도 주지 않은 채 그림을 그리는 것에 전념했다. 갑자기 영감이 샘솟아 일주일에 한점씩 그려낼 수 있었다. 이제껏 없던 쾌거다.
몇 주가 그렇게 흐르고 나서야 이성이 조금씩 돌아왔다. 알베르는 정신없이 자신이 그린 것들을 슥 둘러보았다.
아까부터 제 기억을 툭툭 건드리던 기시감의 정체를 찾아낸 알베르는 묵직한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림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케일을 보며 얻었던 영감이고 착상이다.
그토록 싫어하던 ‘천재’에게서 얻은 영감으로 이뤄낸 발전, 그리고 그 천재가 다름 아닌 케일이며, 그러면서도 이 영감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추한 자신의 모습, 천재인 케일을 향한 질투의 반복. 추하고 뒤틀린 딜레마가 그를 엄습한다.
지워도 지워도 옅어지지 않는 감정이 응어리져 토악질이 올라왔다.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워 올라오는 토기를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더는 이곳에서 버틸 수 없어 이곳을 버리기로 했다.
***
평소 입에 대지 않던 독한 술을 마셔가며 제법 긴 날들을 보냈다. 정신이 맑아지려 하면 술을 목구멍에 들이부어 각성을 미루고 또 미뤘다.
어떻게 알았는지 최한이 찾아왔다. 온전히 맨정신이 아닌 탓에 뚜렷하게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알코올이 흐려놓은 이성을 파고든 것은, 케일을 제대로, 있는 그대로 보라는 말이었다.
‘혹시 케일 님께 질투를 느끼는 것이라면, 타인과 끊임없이 비교당하는 것이 일상인 사회에서 공동체에 속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 인간이라면 당연히 느끼게 되는 감정이라 생각합니다. 그게 케일 님이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어요. 케일 님은 신이시니까요.’라고 덧붙이며 최한에게서 보지 못했던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은 것 같은 기억도 어렴풋이 남아있었다.
흘러가는 시간이 알베르에게 답을 하라 요구한다. 시간 속에 침체한 그는 답을 찾고 있다. 여전히 과거에 얽매여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행동 하나하나에 그 모든 것이 배어 알베르에게 지금의 상태를 되새겨 주고 있다.
그는 침대에 웅크린 채 몸을 떨었다. 지금 자신이 울고 있는지 아닌지는 그에게 아무 의미도 갖지 못했다. 혼란만이 똑같은 요구를 계속해서 보내올 뿐이었다.
그는 이제 술을 마시지 않는다.
알베르는 그의 별장으로 돌아갔다. 화실로 달려가 케일을 뮤즈로 삼아 그려낸 것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최한이 떠나기 전 남기고 간 말들을 곱씹어보았다. 자신에게 케일이 어떤 존재인지, 알베르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느 여름날, 고민을 반복하던 알베르에게 문득 깨달음이 찾아왔다.
연정이었다.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그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인지 똑바로 마주하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제 감정을 마주하고 받아들이자 스스로의 온전한 모습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알베르는 ‘알베르 크로스만’이라는 복잡하고 다채로운 사람을 이제야 제대로 보았다. 진득이 밀려오는 희열감에 씰룩이는 입가를 손으로 매만졌다.
망설인 끝에 알베르는 케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한 번은 채 울렸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전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베르 지금 대체 어딥니까?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요? 연락 준다는 사람이 연락은 안 주고 별장에도 없고 이게 뭐냐고요!”
처음 들어보는 케일의 격앙된 목소리에 알베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하지만 그 걱정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어 케일이 화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했다.
“내가 주위에서 하도 박복한 놈 소리를 들었더니 진짜 박복해졌나…….” 케일이 한숨을 포옥 내쉬며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다녀왔어, 케일.”
“어서 와요, 알베르” 나직하게 들려오는 인사에 케일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싱겁게 웃으며 답했다.
알베르는 어느덧 무더위가 사그라든 여름 햇살을 맞으며 케일이 있는 곳으로 달려나갔다. 숲길을 따라 이어진 발자국이 경쾌한 모양새를 띠었다.
이지
@op_iziii
[ L'été, la mer, et une rencontre ]

__________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