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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하. 날이 참 덥지 않습니까?

 

바깥엔 옅게 어둠이 내려앉고 있고 막 저녁 식사를 해야 할 것 같은 시간대였다. 빛나기 시작한 전서구를 급하게 받았던 알베르는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당황해 눈을 깜박였다. 물론 날이 덥냐, 덥지 않냐를 따지자면 당연히 더웠다. 로운에 여름이 온 지도 몇 주가 흘러 지금은 밤이어도 태양의 잔열이 남아있었다. 그러니 다른 이가 그렇게 물었다면 큰 생각 없이 ‘그래. 이런 날에는 건강을 조심해야 할 텐데, 자네는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나? 자네가 아프면 왕궁에 슬퍼하는 이들이 많을 테니 언제나 조심하게.’ 같은 말을 매끄럽게 하고 지나갔을 터다.

 

하지만 문제는 전서구로 연락이 온 상대가 그의 든든한 아군이자 매번 골머리를 앓게 하는 단 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알베르는 케일이 제게 연락을 할 때마다 알아보기 쉽도록 전서구에 붉은빛이 나게 해두었는데, 케일 또한 알베르의 연락을 붉은빛으로 받고 있다는 건 알지 못한 채였다. 그러나 두 사람 다 ‘받기 싫어도 받아야 하는 연락’의 의미로 구슬에 색을 더해둔 건 같았다. 다시 말해서 연락을 받기 전에 어느 정도 일이 더해질 각오를 하고 받았단 소리였다.

 

“갑자기 안부 인사가 너무 하고 싶어서 연락한 건 아닐 테고, 본론이나 어서 말하게.”

 

알베르는 태연해 보이는 케일 헤니투스에게 손을 휘휘 내저으며 대답했다. 내젓는 손에는 그가 지금까지 일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듯 만년필이 들려있었고, 그 위의 얼굴에는 케일이 전해줄 소식에 관한 기대와 동시에 여기서 일이 더 늘어나나 하는 찌든 표정이 함께했다. 케일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 안부 인사하러 연락하면 안 됩니까?

“뭔데. 자네 요즘 심심한가? 일 없어? 필요한가?”

 

내 거 나눠주게. 그렇게 말하는 왕국의 제1 왕자의 푸른색 눈엔 진심이 넘치듯 흘러나와서 케일은 잠시 제가 연락한 이유를 잊고 통신을 끊어버릴 뻔했다. 잘못하면 저도 끌려 들어가겠다 싶어진 케일은 똑같은 진심을 담아서 이제는 닳고 닳은 제 소망을 말했다.

 

- 기억하고 계시겠지만, 저는 백수가 꿈입니다.

“나도 요즘 꿈을 바꾸고 싶고 그래.”

- 로운 왕국의 별이자 태양이신 저하가 겨우 저와 같은 꿈을 꾸시면 어떡합니까. 저하가 그렇게 말씀하시는 순간 벌써 왕국의 빛이 사라지고 동서남북 사방에서 수많은 이들의 비통함과 절망이 들려오는 것 같은….

“헛소리가 넘쳐나는 것을 보니 그리 급한 연락은 아닌 것 같은데.”

 

어깨에 힘을 좀 빼도 되겠다 싶어진 알베르는 의자에 몸을 푹 기대고 느른한 웃음을 흘렸다. 적어도 제 책상 위에 쌓여있는 종이 더미 위로 비슷한 분량의 종이가 추가될 일은 없어 보였다. 케일은 멋대로 제 말을 잘라먹은 왕세자를 보며 뚱하게 말을 내뱉었다.

 

- 아무튼, 날이 참 더우니 테라스 쪽 창문을 좀 열어두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격식을 차린 거추장스러운 옷 말고 활동하기 편한 복장을 하시면 더 좋겠고요. 환풍이 잘 되게 말입니다. 아,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방 안의 온도가 올라가기 마련이니 사람들을 물리고 혼자 방에 있다가 잠이 드는 것도 여름밤을 견디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호신 물품이나 돈은 별로 필요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챙겨두는 건 나쁘지 않겠습니다.

“자네….”

 

줄줄 나열하는 문장엔 막힘이 없었지만, 뜬금없기도 그지없었다. 케일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린 알베르가 책상에 만년필을 내려두고는 제 양손을 깍지껴 잡았다. 그는 케일 헤니투스가 제게 연락할 때마다 ‘왕국에 도움이 됩니다’라는 명목하에 평온한 태도로 얼마나 많은 폭탄을 던지고 제게 불경하게 대하는지 익히 알고 있었기에 제 주변 사람들을 미리 물러놓은 상태였는데, 지금 와서 그게 정말 잘한 일이라고 느꼈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는다면 자네가 테라스를 넘어와서는 밖으로 날 납치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 역시 로운의 태양께서 모르는 일은 없으시군요.

“거기서 긍정하지 마라. 돌겠네. 미쳤나?”

 

그러지 않았으면 케일은 꼼짝없이 반란죄나 불경죄 같은 죄명으로 붙잡혀갔을 테니까. 케일은 알베르가 그런 생각을 하든 말든, 그의 반응이 제게 해주는 최상의 칭찬이라는 것처럼 전서구 너머에서 누구보다 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용병왕 버드가 또라이라고 하던 이전의 그를 떠올리며 알베르는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누가 누구보고 또라이라고 했던 건지 모르겠다는 문장이 혀끝까지 올라왔다. 하기야 그 정보를 제가 주긴 했었지만, 버드가 케일에 대해 조사하면 똑같이 ‘케일 헤니투스. 또라이.’ 라고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무튼 알베르의 일정은 굉장히 빡빡했다. 제 책상 위에 있는 것들을 곁눈질한 알베르는 부정의 답을 주려고 입을 열었으나, 바로 다음에 이어진 말을 듣고선 깔끔히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왜, 형. 동생이랑 안 놀아줄 거야?

 

 

***

 

 

“세상에 어떤 동생이 형이랑 놀겠다고 형을 납치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한숨처럼 나오는 목소리와는 달리 알베르는 케일이 전서구 너머로 말했던 모든 것을 준비해둔 상태였다. 테라스 문을 열어놓고, 밖에 나가도 튀지 않을 정도의 수수한 옷을 입고, 사람들을 모두 물린 다음에 오늘 저녁 식사는 하지 않고 일찍 자겠다는 말을 남겨두었다. 시종들은 저녁을 거르겠다는 말에 약간의 걱정을 내비쳤으나, 알베르가 드디어 ‘쉬겠다’라고 말한 점에 걱정 위에 그보다 큰 안도를 겹쳤다. 그들의 상사이자 왕국의 실세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도 항상 과도하게 일을 하고 있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쓰러지시면 어떡하지, 가 그들의 주된 걱정이라는 사실을 알베르는 알지 못했다.

 

“순순히 납치당해 주면서 말이 많아.”

 

그리고 전서구로 연락을 넣은 지 몇 분 되지 않아 왕세자 궁의 테라스를 넘어온 태연하게 케일이 그에게 호신용 무기를 챙겨주며 대답했다. 두 사람이라면 쇠붙이가 없어도 딱히 목숨의 위협을 느낄 일이 없으나, 혹시 평범하게 싸워야 할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한 것들이었다.

 

알베르를 형이라고 불렀던 케일은 정글에서 서로를 형과 동생이라고 불렀을 때처럼 편하게 말을 내려놓았고, 알베르는 그것을 딱히 지적하지 않았다.

 

“내게 선택지 같은 게 있었나?”

“선택지가 없으면 큰일이지.”

 

케일은 그리 대답하며 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내용물을 몇 모금만 마시면 끝날 것 같은 작은 유리병이었다. 라온을 닮은 맑은 검은 색의 액체가 병 안에서 흔들렸다.


“그건 정말 납치니까 말이야. 난 왕국에 반기를 들 생각은 전혀 없거든. 형이 안 된다고 하면 안 올 생각이었다고.”

“반기라. 왕궁을 집어삼킬 수 있을 만한 힘을 가진 녀석이 할 말인지.”

“무서워?”

 

알베르가 헛웃음과 말을 흘려내자, 케일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병의 뚜껑을 따며 물어왔다.

 

“짜릿하네.”

 

알베르 크로스만이 알베르 크로스만으로 있는 동안, 케일 헤니투스는 절대 로운 왕국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케일 헤니투스가 케일 헤니투스인 이상 알베르 크로스만은 그에게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

 

케일은 그 말에도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말 뿐이었다. 그는 알베르의 답이 예상했던 말이었다는 듯 굴었다. 하기야 두 사람 사이에 쌓인 신뢰는 그런 것이었다. 던지는 질문에 의문을 담고 있다기보다는 서로가 생각하는 대답을 다시 확인할 뿐인. 그렇기에 알베르는 씩 웃으며 화제를 전환했다.

 

“그건 뭔가?”

“변장용 약물. 마음껏 돌아다니기에 금발과 적발은 너무 눈에 띄고, 형이 본모습을 한다면 다크 엘프라서 눈에 띄니까 마련해왔지. 이왕 하는 납치인데 철저하게 해야지.”

 

왕세자를 납치할 예정이니 적절한 도움을 달라, 는 말에 처음엔 경악 서린 표정을 지었다가 사정을 들은 후엔 장난기 어린 눈으로 온갖 방법을 쏟아내던 케일이 그들을 만류하며 받은 마법 약이었다. 케일은 더 이상의 설명을 대신해 알베르 앞에서 안에 든 액체를 한 모금 마셨다.

 

“오.”

 

알베르의 눈앞에서 케일의 머리 색과 눈 색이 천천히 변해갔다. 어느새 흑발에 검은 눈을 지닌 미남자가 된 케일이 알베르에게 약병을 넘겨주자, 알베르도 망설임 없이 그것을 마셨다. 순식간에 방안에는 흑발과 흑색의 눈을 지닌 남자 두 명만 남게 되었다. 그들은 정말 닮지 않은 형제 같아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 풀리는 마법이지만 오늘 돌아다니기엔 충분할 거야.”

 

애초에 여유는 몇 시간밖에 없었다. 납치를 가장한 놀이를 즐기기엔 알베르에겐 너무 많은 할 일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인 이상 수면 시간도 챙겨야만 했다. 그리고 너무 오래 사라지면 들킬 가능성이 크기도 했고. 케일은 이 왕궁에서 가장 주목받으며, 가장 바쁠 게 분명하고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왕세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지닌 마음에 이름을 붙였다. 동병상련과 측은지심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

 

 

왕궁 밖은 더위 속에서도 여름 축제가 한창이었다. 왕궁에서 주축으로 여는 축제는 아니었기에 그 규모가 거창한 것은 아니었고, 때마다 열리는 장의 규모가 조금 더 커지고 웃으며 길을 걷는 연인과 가족의 수가 많은 정도였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애초에 왕궁에서 주축이 되면 알베르는 사람들 위에서 손을 흔들고 있어야 했으니까. 물론 어지간히 이름이 팔린 케일도 예외가 아닐 가능성이 컸다. 케일은 잠시 자신이 왜 영웅이 되었는가에 대해 억울함을 느꼈다.

 

“이렇게 있으니 본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기분이야.”

 

케일이 들려오는 말에 옆을 힐끗 바라보았다. 적당한 옷을 걸치고 색을 바꾼 알베르는, 그 얼굴 때문에 여전히 가까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지만, 눈에 띄는 화려한 빛이 없는 덕분인지 관심은 그저 잠시의 수군거림으로 끝날뿐이었다. 와중에 잘생긴 청년들 운운하며 꼬치구이 반값 할인을 해준 가게 주인도 있었다. 어쨌든 잘생겨서 나쁜 건 없었다.

 

두 사람은 손에 하나씩 반값이었던 꼬치구이를 들고 걷고 있었다. 그 손에는 꼬치구이뿐만 아니라 수많은 길거리 음식이 한 번씩 들렸다가 입안으로 사라졌는데, 결과적으로 먹지 않은 저녁 대신 더 많은 음식이 배를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알베르는 정말로 케일의 목적이 자신과 ‘노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 워낙에 일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니 또 비밀리에 무언가를 하는가 싶었지만, 케일은 꿍꿍이를 하나도 내비치지 않고 충실하게 이런저런 가게를 알베르와 함께 다니면서 축제 구경과 식도락을 즐기고 있었다.

 

“그렇습… 그래? 요즘이야 굉장히 바쁠 테지만, 그 전엔 가끔 이렇게 나왔을 거라 생각했는데.”

 

저도 모르게 존댓말을 쓰려고 했던 케일이 말을 바꾸며 대답하자 알베르가 얕게 웃음 지었다. 조심해야지, 하고 장난스러운 말을 앞에 끼워 넣은 왕세자는 다른 손으로 손부채질을 하며 선선히 대답을 해왔다. 밤이라 덜 하긴 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더운 날씨였다.

 

“그렇지. 변장과 변복을 하고 돌아다닌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지금의 색보단 더 원래 모습에 가까운 색의 머리카락과 눈 색을 하고 돌아다닌 적도 있는데 말이야. 그것도 일부러 그랬지.”

 

지금보다 더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스스로 택해서 왕궁에 남아있기로 했던 왕자는, 그럼에도 가끔은 해방감을 원했다. 모두의 앞에서 자신의 색을 그대로 드러내고 다니길 원했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이젠 그런 욕망을 누를 만한 자제력이 있을 뿐. 알베르가 냠, 하고 꼬치의 고기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전혀 건강하지 않은 맛의 감칠맛 나는 소스가 입안을 가득 메웠다. 이런 게 여름의 맛일까, 하고 그는 문득 생각했다. 덥고, 진득거리고, 조금 불쾌한 달콤함을 느끼며 그는 산책로를 향해 턱짓을 해 보였다. 조금 더 걷자는 표현이었다.

 

“그때보다 지금이 더 자유롭게 느껴지는 건 네 덕분일거야.”

“일을 하도 많이 줬더니 그 반동으로 더 자유롭게 느껴지는 건가….”

“일을 많이 주는 건 알고 있군, 자네?”

“다 형을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거지.”

“퍽이나.”

 

피식거리는 웃음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중앙 광장의 분수를 둘러싸고 있는 산책길은 왕궁 내에 있는 정원과 비교하면 다소 초라한 모양새였지만, 그것이 두 사람의 여유로움과 즐거움을 빼앗아가진 않았다. 사실 그저 흙길이었다 해도 좋아했을 터다. 그러면 지금보다 더 후덥지근했을 테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너는 내 원래 모습을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누구도 모르는 채로 혼자 그 모습을 하고 다니는 것과 알고 있는 사람과 함께 다니는 건 다르지.”

 

발걸음을 옮기던 케일이 흠, 하고 작게 소리를 냈다. 엄밀히 말하자면 왕궁에는 자신 이전에도 알베르의 본 모습을 아는 이가 있었다.

 

“타샤는?”

“…흠. 그러고 보니 몇 번 같이 다니긴 했었네.”

 

케일의 지적에 알베르가 긍정을 표하며, 다소 미묘한 목소리를 자아냈다. 숨길 수 없는 의문이 대답에 실려 나왔다. 그래. 그때엔 타샤가 있었다. 그럼 지금이 이렇게나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이렇게 들뜬 기분이 되는 건 무슨 이유에서인가? 알베르는 자신에게 질문하며 손에 남아있는 막대를 착실히 쓰레기통에 버렸다. 여름의 맛은 사라졌지만, 울리는 벌레 소리와 멀리서 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여름의 청취로 남았다.

 

케일은 알베르의 고민이 손안에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지만, 그것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할 말이 있었다.

 

“외모가 그렇게 중요해?”

 

흑발의 케일 헤니투스가, 혹은 김록수가 툭 내뱉듯 물었다. 검은색의 머리카락. 검은색의 눈동자. 무슨 색이든 너무 튀지만 않으면 된다는 말에 라온은 자신을 닮은 색으로 만들었다며 검정색의 염색약을 건네주었었다. 그것을 처음 제 손에 쥐었을 때 한없이 깊은 눈을 했던 남자는, 그때와 같은 시선을 제 옆의 사람에게 주었다.

 

물론 외모는 중요하다. 특히나 알베르에겐 더욱 그럴 것이다. 자신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할 자리를 위협하며, 존재의 의미에 혼란을 주니까. 태양신의 축복. 인간의 지배자는 인간이여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이 왕국. 로운 왕국.

 

케일이 그런 걸 모르고 그에게 질문을 던진 것은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국내와 대륙의 정세 모두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도 다른 이들만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알베르가 평생 자신의 모습을 숨기며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케일이 지금까지 해온 일에는 알베르가 다크 엘프 쿼터로서 본연의 모습 그대로 로운 왕국을 다스리게 할 수 있게끔 하는 작업도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케일 헤니투스의 질문은 알베르 크로스만을 향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향한 말이었다. 그는 염색약을 쥐었을 때 스스로 잠겼던 고민의 끄트머리를 알베르라는 청자에게 꺼내두었지만, 그건 방백에 가까웠다.

 

하지만 알베르가 그런 사정을 알 턱이 없을 터였다. 비단 알베르가 아니더라도 이 세상의 누구도 알지 못했을 터다. 케일 헤니투스가 사실은 어둠을 잡아먹은 듯한 흑색을 두른 한국인 김록수라는 사실은 그 자신 말고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으니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외모가 아니겠군.”

 

그러나 언제나처럼 알베르는 케일의 질문에 대답을 해왔다. 자신에게 던져진 것이 아닌 질문으로도 제 안에 서린 의문을 해결했다는 듯 후련하게 웃는 낯이 김록수의 갈색 눈에 비쳤다.

 

“자네는 ‘나’를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더 특별하게 느껴진 거였어. ‘왕세자’이며 매끄러운 말을 잘하는 알베르 크로스만이 아니라 ‘형’으로서의 알베르 크로스만을 말이야. 그건 중요하지. 그리고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알면서도 태도가 변하지 않는 것도, 놀라지 않은 것도 큰 몫을 했네. 놀라긴커녕 자네는 거래를 해왔었지.”

 

사뭇 즐거운듯한 목소리가 뜨거운 공기 중에 퍼졌다. 의문을 담고 있기보다는 서로의 대답을 다시 확인할 뿐인 질답. 그 답을 들으며 김록수이자 케일 헤니투스는 진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마 알베르 크로스만은 제가 다른 차원에서 건너온 사람이라고 하여도 저를 바라보는 시각이 크게 변하지 않을 터였다. 빙의자라고 하면 좀 흔들릴지도 모르지. 혹은 알고 있는 정보를 다 뱉어보라고 했다가, 체할 거 같으니 멈추고 자긴 도와주기나 하고 떡이나 먹을 테니 지금까지처럼 해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하여튼 왕세자도 참 웃긴 놈이었다.

 

케일 헤니투스는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라고 이름 붙여도 될 감정이 제 안에서 다시 사라지는 걸 느꼈다. 알베르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주변엔 이미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이 많았다. 케일과 김록수 사이의 경계는 무너진 지 오래였고, 그는 자신이 케일로 쌓아온 삶을 기꺼이 자신의 것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참 잘했어요’ 도장이라도 찍어줘?”

“그건 또 무슨 도장인데? 그걸 어디에 찍어?”

 

하지만 한국식 농담을 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건 가끔 재미없긴 하군. 하고 케일이 속으로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냥 그런 게 있어.”

“싱거운 놈.”

“그 싱거운 놈이랑 저걸 해보러 가는 건 어때?”

 

케일이 손을 들어 산책로의 끝 부근에 있는 상점을 가리켰다. 사람들 사이로 보이는 입간판을 보니 다트를 던져서 높은 점수를 내면 상품을 주는 가게인 모양이었다. 알베르 또한 그것을 보았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이긴 사람에게 소원 하나는 어때?”

“서류 넘기기라면 안 받아.”

“그건 나도 싫으니 빼도록 하지.”

“좋아.”

 

즉석에서 내기가 성립되었다. 알베르와 케일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가 천천히 상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어느 여름의 축제에서, 케일은 알베르에게 소원 하나를 들어주는 처지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알베르에게 여름은 오랫동안 고기 꼬치와 나른하게 흐르던 케일의 목소리로 기억되었다.

__________ fin.

보이차

@PuerteaN

[ 그 여름밤의 추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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