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라이트한 케일른(알베케일, 최한케일, 버드케일) 내포
- 섹슈얼한 암시 있음, 방송통신위원회 15세이상관람가 기준 준수
- 오프더레코드 AU
돌이킬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이건 인간적으로 인정이 결여되어 있다고, 버드는 생각했다. 이 정도면 말렸어야지! 버드는 지금 이 순간 모든 불만을 폭로할 생각이었다. 물론 술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어도 가벼이 나불거리던 입이었지만 말이다.
“이 날씨는 사기야.”
“부정할 순 없어.”
버드의 말에 같이 걷던 알베르가 잽싸게 긍정했다. 기품 있게 손 부채질을 한 알베르가 제 앞에서 걷고 있는 붉은 머리 청년을 힐끗 바라보다가, 다시 주변을 살폈다. 이 정도면 강물도 끓을 것 같은데. 걸을 때마다 물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한국이 이렇게 덥다고는 말해주지 않았잖아. 베트남이 여기보다 시원하겠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군.”
다시 한 번 알베르가 버드의 말을 받아치자, 케일 옆에서 핸디 선풍기를 돌리고 있던 최한이 매섭게 고개를 뒤로 돌렸다.
“케일 형이 왜 그런 것까지 미리 알려줘야 하지? 덥다면 옷을 벗어.”
“아니, 최한. 그건 아닌 것 같ㅇ… 벗지 마, 미친놈아!”
더위에 정신을 놓은 버드를 말릴 수 있는 건 케일의 단말마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최한의 의견이 훌륭하다며 입고 있던 티셔츠를 훌렁 벗으려 한 버드는 정말이지, 익어가고 있었다. 그는 뇌에 몰린 열을 식힐 필요가 있었다. 과부하가 온 정수리에 케일이 친히 최한의 핸디 선풍기를 대주었다. 이 시간에 사람 없는 동네라 망정이지, 주말이었으면 이미 주변의 이목을 사고도 남았으리라. 물론 네 사람의 준수한 외모 때문에 오늘이 주말이었다면 훤히 사방이 뚫린 잠원한강공원에 대낮부터 나와 있진 않았을 것이다.
“오고 싶다던 놈이 왜 제일 지랄이야?”
“촬영하는 내내 한강 가서 돗자리 펴놓고 누워 있다가 치킨 시켜먹는 게 로망이라고 말했잖아. 난 다 기억하고 있다고.”
“그게 결코 한여름에 하고 싶다는 말은 아니었어.”
영화 ‘백작가의 망나니가 되었다’의 주인공 케일 헤니투스 역을 맡은 케일이 마침내 살짝 짜증을 냈다. 사실 오늘 일정에 공원이 포함된 것은 대한민국의 자랑인 인터넷 속도를 체험하던 버드가 즉흥적으로 낸 의견이었다. 블로그 들어갈 서치력은 있지만 오늘 신사동 날씨 서치할 여력은 없었던 모양인지, 버드의 요란스러운 의견 표출에 세 사람은 가로수길 외곽 후미진 곳에 있는 카페에 나와 영상 36도에 고통 받는 중이었다. 미친 습도. 한국의 여름은 뜨겁고도 수증기 넘치는 계절이었다.
네 명 중 유일하게 한국인 국적을 가지고 있는 최한은 불행하게도 작년 여름을 겪지 못했던 터라, 체력이 실시간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영국 요크에서 촬영하는 내내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그가 저기압인 게 눈에 보이자, 케일은 버드에게로 돌렸던 선풍기를 다시 최한에게 돌려주었다.
“형, 형은 안 더워요?”
땀을 뻘뻘 흘리던 최한이 선풍기를 든 케일의 손을 마주 잡더니 바람이 케일 쪽을 향하도록 방향을 돌려주었다.
“난 괜찮으니까 네가 써. 너 지금 얼굴 엄청나게 빨개.”
“이건 형이랑 손잡고 있어서 빨간 건데.”
수줍게 웃는 최한에 케일이 할 말을 잃고 어버버 거리자, 알베르가 나섰다.
“수작 부리지 마, 최한.”
“남이사.”
“알베르 씨, 당신이야말로 괜찮아요?”
“나? 물론이지.”
강한 햇빛 때문에 금발이 새하얗게 보였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천연 조명빨 빡세게 받은 알베르는 영화 촬영할 때보다도 더 성스러운 비주얼로 케일에게 미소 지었다. 굵은 땀방울이 위태롭게 턱에 걸린 것에 정신 팔려서 케일이 그의 말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지만, 대강 그런 말이었다. 한국의 한강 구경은 이 정도면 충분하니 제발 실내로 가자. 최한보다 한국에 오래 산 대한외국인 케일이 결국 일행을 끌고 시원한 인근 카페로 데려갔다. 버드의 주도로 시작된 여름날의 미친 일탈은 그렇게 처참히 끝났다.
“한국 카페는 천국인가?”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 카페에 들어가자마자 버드가 외쳤다. 손님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들어가긴 했지만, 케일은 수치스러웠다. 기본적으로 배우는 대중의 관심을 먹고 사는 직업이라지만, 이 새끼는 ‘진짜’였다. 대중이 아니라 온 세계가 그에게 집중하길 바라는 것일까. 과연 월드클래스 할리우드 스타란. 술 마시고 깽판 치는 역할은 분명 자신인데, 버드 이 녀석은 역할에 너무 이입했는지 커피 마시고도 깽판 칠 것 같았다.
“여름엔 카페 피서가 제일 낫긴 해.”
“피서지가 카페라니, 한국인들 소소하네.”
“조금 전에 천국이라며?”
“소소한 천국이라고~!”
빠르게 말을 바꾸는 버드를 물고 늘어지던 케일이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나른하게 몸을 뉘인 케일에 다른 사람들도 의자에 등을 대려다가 화들짝 허리를 세웠다. 등에 땀범벅이라 편히 누울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케일 넌 땀이 잘 안 나지.”
사계절 내내 선선한 날씨를 유지하는 영국에 있는 동안 땀 날 일이 뭐 얼마나 있겠느냐마는, 알베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차단된 비좁은 공간에서 몇 번이고 케일과 단둘이 땀 뺐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도 알베르는 비 오듯이 땀을 뻘뻘 흘렸는데, 케일은 뒤처리 다 하고 나갈 때까지도 뽀송했다.
“네. 거의 안 나요.”
케일이 무심하게 대답하며 티셔츠를 팔락거리는 최한의 목에 선풍기를 돌려주었다. 그렇게 해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몇 번이고 거절했지만, 재미있으니 하겠다는데 최한이 말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최한은 땀만 마르면 케일에게 치대고 싶다는 욕망을 애써 누르며 카페에서 제공되는 냅킨으로 종이접기했다. 목에 바로 닿는 시원한 바람이 덥게 느껴져서 곤혹스러웠다.
“시원하니까 술 마시고 싶은데, 우리 저녁때 삼겹살에 소주 어때? 더울 땐 술이 최고지!”
서울 한복판에서 초록색 병 들고 다니지 않는 것에 감사해야 할까. 이미 어제 SNS에서 한국 소주 최고라고 영상 올린 것으로는 부족했을까. 케일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그의 몸 안에 흐르는 피의 절반이 들끓었다. 반쪽짜리 코리안 소울이 버드를 자제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술 마실 때 목소리만 낮추면 데려갈게.”
“케일 형, 제가 잘 아는 곳에 프라이빗 룸 있어요. 거기로 예약할까요?”
한국 16년 거주 경력의 최한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여기 상권 자주 바뀌어서 네가 알던 식당이 스쿨푸드가 아닌 이상 없을 텐데. 케일은 최한의 호의를 거절하려다가, 최한이 입은 하얀 셔츠 깃 사이로 무언가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최한.”
“네?”
“너 목에 자국 남은 거 알고 있었어?”
무덤덤한 어조였지만, 내용이 범상치 않았다.
“네?”
“응?”
“뭐라고?”
케일의 질문에 최한을 비롯하여 자리에 있던 이들이 빠른 반사 신경을 발휘하며 반문했다. 그 순간 카페 직원이 주문한 음료를 가지고 왔다.
“주문하신 음료 드릴게요~.”
트레이에 있던 잔이 테이블로 오기까지의 시간이 천 년과도 같았다. 너무 느렸다. 하필 또 인원은 4명이나 되어서! 단둘이면 되는데. 자리에 있던 4명 중 3명이 똑같이 생각했다. 직원이 떠나자 케일은 평화롭게 빨대를 빨았다. 역시 여름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지.
“케일.”
케일 외 세 명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순서를 정하더니, 한국의 적법한 장유유서 법칙에 따라 알베르가 입을 열었다.
“너 어제 마지막에 누구랑 있었어?”
“혼자 있었는데요.”
별걸 다 물어본다는 투였다. 하지만 케일, 넌 항상 그런 식이지. 세 사람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케일은 따로 추가 주문한 우유 약간을 제 아메리카노에 부었다. 영국에 지내면서 새로 생긴 식습관이었다. 진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우유가 가미되니 유백색 잉크를 탄 것처럼 천천히 색이 퍼졌다.
“최한 목에 자국이 있다는 건 그럼 무슨 소리야?”
“원래 생기면 오래가잖아요.”
무신경한 말투, 아래로 내리깐 저 예쁜 속눈썹에 속아 넘어간 지 2년 차였다. 케일식 화법에 말려들어갈 순 없었다. 눈치를 보던 버드가 옆에서 말을 얹었다.
“케일, 어제 내가 마지막 아니었어?”
“맞아. 버드 너랑 헤어진 게 마지막이었는데?”
알베르와 최한이 바람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돌려 버드를 노려보았다.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버드도 두 사람의 맹렬한 시선에 기가 죽었다.
“아니, 어제 둘이서 그냥 SNS에 영상 올리는 방법 얘기한 게 다야.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안 했어. 난 술 마시고 하는 거 안 좋아한단 말이야.”
버드가 쓸데없는 정보까지 내뱉었다. 알베르와 최한은 그딴 건 알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케일은 울긋불긋한 세 사람의 얼굴을 보며 빨대를 휘저었다. 살짝 녹은 얼음 조각이 상아색이 된 우유 탄 아메리카노 안에서 시원한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케일이 탁한 색이 된 아메리카노를 흡족하게 살폈다.
“대화 내용 화끈한 와중에 찬물 끼얹어서 미안한데,”
케일이 우유 섞은 아메리카노를 한번 쪽, 빨아먹었다.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로 폰 액정을 톡톡 두들기더니 세 사람에게 화면을 보여주었다. 호텔 예약 기록이었다.
“오늘은 넷이서 잘 거야. 공평하지?”
뭘 할지 상상은 알아서. 케일이 말을 덧붙이자 세 사람이 한숨을 팍팍 내쉬었다. 케일은 주문했던 제 음료를 내려다보며 다시 빨대를 휘저었다. 안에 너무 많이 넣었는지 살짝 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뭐든 적당히 해야 하는데 우유 욕심이 과했나. 예상한 맛도,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라 케일은 짧게 코로 숨을 내쉬며 다리를 꼬았다.
“케일 형이 바라는 거라면… 전 따를게요.”
그 와중에 젊은 만큼 태세 전환이 빠른 변절자가 등장했다.
“얼씨구? 미쳤냐, 너.”
“그럼 넌 꺼져, 안 낄 놈이 말이 많아.”
최한의 얼굴이 험악해지자, 버드가 이 미친놈 소굴에서 멀쩡한 놈 하나쯤은 있겠지 싶어서 고개를 돌렸다.
“돌겠네.”
그렇지, 말 한번 잘한다! 아까와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버드가 알베르의 말에 지원사격 들어가려는 찰나, 알베르가 곱상하게 생긴 외모만큼이나 우아하고 결단력 있게 말을 이었다.
“할 거면 제대로 해.”
“……환장하겠네, 이 단단히 미친놈들! 단체로 더위 먹은 게 틀림없어.”
여기서 정상인은 나뿐인가 봐. 역시 이놈들 사이에 있을 때는 멀쩡한 정신으로 있는 것보다 술에 취해있는 게 낫지. 버드는 카페 쇼케이스에 진열되어 있던 맥주로 음료를 새로 주문하기 위해 벌떡 일어났다. 더 있다간 케일 한정 예스맨들에 물들어버릴 것 같았다.
근진원샷
@TDoneshot
[여름엔 화이트 아메리카노]
__________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