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차례 맞이했던 계절이었음에도 여름은 언제나 익숙해지지 않는 열기를 품고 있었다.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속, 화려하게 피어난 꽃들이 춤을 추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최한이 고개를 돌렸다. 잘 가꾸어진 화단에서 시선을 틀다 보면 흔들리는 적색이 다정한 빛을 내며 그 자리에 있었다. 아이들이 다녀갔는지 품 한 가득 들어찬 꽃들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곱다. 혹여나 꽃잎 한 장 바스라질까, 아니면 눈을 떼는 순간 시들까. 최한은 걱정이 눈에 훤할 정도로 조심스러운 행동에 괜한 웃음이 입안을 채우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한 여름의 풍경이었다. 그 사실이 못내 다정하게 다가왔다.
최한의 여름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교복을 입은 채 친구들과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서 운동장 그늘진 구석에 앉아 있던, 이제는 흐릿해진 과거가 첫 번째였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으면 누군가 한 명이 꼭 축구공을 들고 왔던 것도 기억난다. 땀에 젖은 셔츠가 몸에 딱 달라붙는데도 쉼 없이 달리면 어느새 열기에 취해 더운 지도 모르게 되었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공을 차다보면 태양은 중천에 떠 있다가 어느새 지평선을 향해 달렸고, 골대 역시 해가 지는 곳에 있어서 최한은 노을이 선연하게 일렁이는 지평선으로 마주 달리고는 했다. 골키퍼가 제대로 보였던가, 모르겠다. 발의 안쪽에 흔들리던 공이 닿던 감각은 아직도 생생한데. 지나친 세월에 마모된 기억이 뿌옇게 흐려져 이제는 공을 차던 이들이 몇 명이었는지, 그 아이들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리는 것도 벅차졌다.
두 번째 여름을 생각하기도 전, 잠시 상념에 빠지려던 최한은 툭 무릎 아래로 무언가가 치고 지나간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숙이니 그의 주먹만 한 공이 발 주변을 굴러다녔다. 공? 익숙한 크기와 디자인은 아이들의 장난감 중 하나였다.
"미안하단 건데!"
고개를 기울이고 있자 멀리서 외치는 홍과 공을 가지러 오는 온이 나란히 보였다. 자, 여기. 최한은 공을 주워 온에게 건네주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고양이인 채로 즐기는 공놀이가 퍽 즐거웠던 모양인지 공을 받고 나서 앞발로 공을 밀어내며 꺄르륵 웃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최한은 맑게 갠 정신에 뺨을 긁적이며 아이들을 따라 웃었다. 뭐, 아무렴 어때. 상념에서 깨어나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톡 톡.
한참을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옆에서 경쾌한 음이 하나의 선율을 이루듯 들려왔다. 최한은 익숙한 박자로 울리는 소리에 곧장 옆을 보았다. 올곧게 마주해오는 암갈색의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다물려 있던 입술이 벌려지며 하나의 단어를 내뱉는다. 최한. 굴려지는 발음이 썩 나쁘지 않았다.
"네, 케일 님."
케일 헤니투스는 자그마한 부름에도 금세 곁으로 다가오는 최한의 뒤에서 마구 흔들리는 꼬리의 형상이 일렁이는 것을 목격했다. 유순하게 내려간 눈매의 끝자락이 꼭 주인을 바라보는 강아지와 흡사하여 그런지 꼭 대형견을 앞에 둔 것 같다. 그는 그런 생각을 잠시 미뤄두고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질문치고는 높낮이가 없는 말이었다. 최한은 짧은 문장 안에서도 케일의 성격이 녹아들어 있는 것에 웃음이 새어나올 것 같아서 뒷짐을 진 채로 아까 전처럼 주먹을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수십 초처럼 길게 느껴졌던 인내의 시간이 지나고, 그는 무슨 대답을 할지 고민했다. 별 거 아니었다는 말은 통하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고 있던 탓이었다. 그렇다 하여 청승맞게 과거를 떠올리고 있었노라 이실직고하는 것도 그리 내키진 않았다. 말한다 해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하지만 두 가지 선택지를 전부 저버리고 난 후엔 남은 선택지가 없었다. 이지선다형 객관식을 포기하면 주관식밖에 없건만, 최한은 답의 존재 유무도 모르는 문제를 창의력을 발휘해 답할 정도의 재능은 없었다. 어쩌겠나. 글과는 담을 쌓은 제 어휘력 탓이지.
"그냥, 별 생각 안 했어요."
우물쭈물 이어지는 답에 케일의 눈썹이 삐뚜름히 올라갔다. 그는 최한이 멍하니 있던 때부터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었다. 론에게 꽃을 부탁한 이후로 쭉 향하던 시선도 못 알아챌 만큼 생각의 늪에 빠져 있던 녀석이 뻔한 대답을 내놓으니 이보다 더한 거짓이 어디 있을까. 케일은 한숨을 내쉬더니 제 앞을 가리켰다. 근소한 차이를 두고 빗겨간 그늘의 바깥에 서서 땀을 흘리는 모습을 보니 계속 세워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닌 척 배려하는 그 행동에 상대가 숨 죽여 웃는 것을 보았는지 케일의 눈매가 날카로워지자 그는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머리 위로 그늘이 지니 확실히 선선하긴 했다.
최한은 제 몫의 레몬에이드를 마시며 속에 쌓여 있던 열기를 식혔다. 얼음이 저들끼리 부딪히며 내는 맑은 소리가 괜스레 시원했다. 땀에 젖어 있던 뺨이 붉으스름하게 달아오른 것이 생소하였던 탓에 케일은 턱을 괴고서 최한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꿰뚫을 듯 응시했다. 그는 온통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피부는 적당히 타 있었으며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는 흉터들이 볼이나 턱 부근에 자리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명도가 아닌 채도를 지닌 것은 붉은빛이 도는 볼과 입술뿐이었다. 옛날 영화의 흑백 필름 속 주인공을 꺼내어 두 부분만 색깔을 입힌다면 저렇겠지, 하는 생각도 들고 색이 없음에도 어쩌면 자신보다 더 생동감이 넘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듯 최한의 색은 검었지만 결코 서늘하지 않고 따뜻했다.
그래서, 케일은 여름을 뒤로 하고 피어나는 청춘이 어여뻐서, 문득 궁금해지고 말았다. 이렇게 밝은 네가 무슨 이유로. 왜,
"그런 표정을 지었을까..."
하고. 입 밖으로 새어나온 물음은 희미했지만 최한의 귀는 문제없이 말을 받았다. 네? 최한이 반문한다.
"…아니야. 마시던 거 계속 마셔. 아이스크림도 줄까?"
"아, 괜찮아요. 이걸로 충분합니다."
"그럼 됐고."
최한의 표정은 굳이 색으로 비유하자면 옅은 분홍빛이 감돌았다. 포근하고 따스한, 애정에 젖어 사랑스러운 빛이. 케일은 최한이 웃으며 색을 가지는 그 순간을 좋아했다. 빌어먹을 영웅의 탄생을 벗어나 그제야 제 또래처럼 웃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꼭 심장이 간질거려서, 그것이 저와 다른 이들의 곁에서 이루어졌단 사실이 좋았다. 그렇기에 더욱 아까와 같은 표정이 뇌리에 박혀 잊히질 않는 것이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흐려진 얼굴은 아직 소년인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으므로.
달칵, 얼음 하나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케일이 입술을 뗐다. 최한,
"길 잃었어?"
그게 아니면 왜 그런 표정을 지었어, 한아.
길을 잃고 방황하는 아이의 혼란스러운 표정이라면 김록수 시절 지겹도록 봐왔기에 알고 있었다. 소중한 것을 손에서 놓친 채 하염없이 울다가 제자리를 벗어나버린, 결국 완전히 미아가 되어버린 이들을 품어 보호소에 데려다주던 게 그의 일이었으니까. 케일은 솔직히 말하여 최한의 일그러진 얼굴에 담겨 있던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모르면 물어보면 되는 일인데.
허리를 곧게 핀 그가 턱을 괴었던 손을 내리고 제 몫의 레몬에이드를 빨대로 휘적이며 말을 내뱉었다.
"너, 아까 네 표정이 어땠는지 알아? 꼭 길 잃은 녀석 같았어. 그러니까 물은 거야. 무슨 생각 했냐고."
최한은 꼭 잘못을 하고 혼나는 강아지처럼 찔끔 떨더니 이젠 다 비워진 잔을 만지작거렸다. 표면에 서린 물방울이 거친 손에 그대로 스며든다. 나 참, 어차피 간파당할 거 뻔히 다 알면서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건지. 케일은 그런 생각은 접어두고서 인내심을 가지고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저 영원토록 안고 갈 무언가를 만들지 않기만 하면 된다. 케일이 최한에게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
최한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언어를 고르고 또 문장을 수정해가며 어떻게든 자신에게 큰 짐을 주지 않는 말을 내뱉기 위해서일 터였다. 결코 좋진 않을 추억을 들려주는 것이 옳은 것일까, 하고 뇌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몇 초의 시간이 흘렀다. 얼음 하나가 또 아래로 가라앉았다. 케일이 말했다. 언젠가 라크에게도 했던 말이었다.
“뱉어내.”
가지고 있어서 아플 기억이라면 그냥 뱉어내고 속 시원히 살아. 망설이지 말고, 남한테 기대어 투정도 부려보면서.
아, 하고 자그마한 탄식이 새어나오며 끔뻑끔뻑 동그랗게 떠진 눈이 두어 차례 감았다 떠졌다. 다시 한 번의 침묵이 찾아왔다. 유리잔의 둥그런 바닥 모양을 따라 물로 이루어진 원이 생겼을 때가 되어서야 최한은 손가락을 서로 얽어매며 겨우 입을 열었다.
“여름... 에 대해 생각했어요. 제가 겪은 여름들에 대해서요.”
한 번 연 입은 이 순간만을 기다린 것 마냥 잔잔한 음색을 토해냈다.
예전에는 여름만 되면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친구들이랑 저녁까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곤 했어요. 근데, 문득 그때를 떠올려보니 정작 친구들의 이름이랑 얼굴이 기억나지 않더라고요. 그게, 네. 그 사실이 조금 울적했을 지도 몰라요.
황홀경에 대해 이야기 하듯 부드럽게 풀린 얼굴에 심장이 조금 아프기도 했던 것 같다, 고 케일은 생각했다. 그는 흔히들 하는 끄덕임도 없이 이야기를 들었다. 빌어먹을 영웅의 탄생.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먼 과거의 추억에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욕설을 잇새로 짓씹으며, 가만히 소년의 여름을 상상하고 있으니 앞에 앉은 이는 무엇이 그리도 쓸쓸한지 홀로 겨울에 서 있는 듯 시린 분위기를 자아낸 채 조심스럽게 뒷이야기를 계속했다. 두 번째 여름의 편린이었다.
“사실 저, 최근까진 여름을 별로 좋아하진 않았어요. 어둠의 숲은 여름만 되면 괴수들의 냄새가 짙어지거든요. 습기에 질식할 것 같기도 하고, 마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 소드마스터가 되기 전엔 꼭 한 번씩 열사병에 걸리기도 했어요.”
최한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도로 다물었다. 상세한 이야기는 굳이 할 필요 없으리라. 이걸로도 충분히 여름의 기억은 전해졌을 테니. 케일 역시 깊게 파고들 마음은 없었기에 고생했겠네, 한 마디만 전했다. 슬쩍 쳐다본 최한의 얼굴에는 옅은 수줍음만이 남아 분홍빛을 내고 있었다. 속내를 털어놓은 것에 대한 약한 부끄러움이 전부인 표정에 안도했던가. 후련하게 웃는 최한을 보며 그 역시 입매를 풀어 호선을 그렸다.
자, 그럼.
케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최한은 제 앞에 내밀어진 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여 멀뚱히 있다가 본능처럼 자신의 손을 그 위에 올렸다. 바람 빠지게 웃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 고개를 든 후에야 그는 자신이 강아지처럼 굴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죄송합니다! 금세 빼버린 손을 쫓아 붙잡은 것은 희고 또 가녀린 손이었다.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한 손은 종종 쥐는 펜 때문에 약지 첫 마디에 생긴 굳은살을 빼곤 폭신한 솜사탕이라도 쥔 것 마냥 가볍고 부드러웠다. 케일은 최한의 손을 잡아서 제 쪽으로 당겼다. 최한은 불가항력처럼 미약한 힘을 거부하지도 못하고 그에 맞추어 발걸음을 옮겼다. 케일의 목소리가 다정한 온기를 품은 채 울렸다.
“최한. 내가, 여름에 대해 알려줄 거야.”
그러니 제대로 들어.
한 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다 그늘과는 멀어졌다. 눈앞에 있는 붉은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어지러웠다. 최한은 정원의 구석에 다다른 후에야 발길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시금 목소리가 나른히 진동했다.
“네 여름이 어땠는지, 솔직히 난 들어도 잘 몰라. 네가 여름을 싫어하든 아니든 그것 역시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고.”
케일은 낮은 음으로 자장가라도 부르듯 잔잔히 언어들의 집합을 내놓았다.
“하지만 내가 확실히 아는 게 뭔지 알아?”
언뜻, 목소리가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시선이 푸른 배경으로 돌아갔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닿지 않은 구석엔 여름이 그대로 녹아 있는 채 자리하고 있었다. 선선한 풀내음과 어우러진 흙냄새, 후끈한 열기를 태우고서 유유히 스쳐지나가는 바람과 지난 밤 내린 비에 젖어 농도 짙은 향을 뿜는 장미까지. 고목에 붙은 매미는 시끄럽게 울며 제 생을 세상에 알렸고 잠자리는 곧게 펴진 날개를 떨며 허공에 그림을 그리며 날았다. 최한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며 여름의 풍경을 시야에 담다가 제 뺨에 닿는 무언가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네 여름은 여기에 있어, 한아.”
붉은 장미보다 더 붉은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최한은 건네진 장미를 조심스럽게 쥐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순간 최한은 친구들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괴수들의 냄새가 어땠는지 더 이상 떠오르지도, 궁금하지도 않아졌다. 한 차례 지나간 장마에 모든 게 씻겨 내려가서 붉은 장미 한 송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가 기억해야 할 것은 친구들의 이름이 아닌 케일 헤니투스의 이름이었으며 괴수들의 냄새가 아닌 여름에 젖은 장미의 향이었다. 코를 스치는 여름의 향기가 넘쳐흐를 애정에 적셔져 찬란하게 빛났다. 달싹이던 입술이 이내 사이로 파아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케일 님, 저는요.”
저는, 아마도 여름을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붉은 장미에 수줍게 입을 맞추며 최한이 속삭였다. 비로소 찾아온 소년의 여름이었다.
단야
@summer__CHCS
[ 소년의 여름 ]
__________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