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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망되 섬네일.jpg

후덥지근하고 습기 찬 공기가 피부에 달라붙는다. 책을 보고 있던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 부슬부슬 소나기가 오고 있었다. 장마가 오기 전 잠깐 내리는 비였다. 케일은 멍한 눈으로 비가 내리는 것만 바라보다 홀린 듯 천천히 일어났다. 그냥, 밖에 나가보고 싶었다.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문 앞에 서서 밖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소나기 같았는데 꽤 굵은 빗방울이었다. 지나가는 비일 텐데 생각보다 오래 내린다. 손을 적시는 비를 보다가 걸음을 옮긴다. 손에서 팔, 어깨, 그리고 몸까지. 천천히 비에 적셔진다. 정처 없는 발걸음은 느릿하고, 나른했다. 그의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처리할 것이 있어서 전부 다른 곳에 보내버린 탓이었다. 분명 이런 모습을 봤다면 놀라서 말렸겠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 복잡해 죽겠네."

 

케일은 비에 젖은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손이 쓸어간 자리를 내리는 비가 다시 채운다. 오늘 아침에 보았던 기억도 비에 씻겨 내려갔으면 좋으련만. 다시금 떠오르는 아침의 기억에 고개를 저었다. 저를 보는 최한의 눈빛에서 느껴진 온갖 감정 중 유일하게 익숙지 않았던 것. 받은 적이 거의 없었기에 오히려 알아차리기 쉬워진 그것. 그리고 최한이 제 책상 위에 두고 미처 치우지 않은 한글로 쓰여진 쪽지. 그 모든 것들은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져 있었다. 설마,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해왔는데. 어렴풋이 눈치챘으면서도 애써 모른 척했는데. 케일은 정원 한가운데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쉴 새 없이 얼굴을 때리는 비에 눈이 제대로 뜨이지 않았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가만히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디 한 곳에 주의를 집중해야만 생각을 밀어 놓을 수 있으니까. 그때, 빗소리 사이로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케일 님."

 

눈을 뜨고 목소리가 난 쪽을 보니 까만 옷을 두른 그가 케일을 보고 있었다. 케일을 지키기 위해 남은 사람이었다.

 

"최한."

 

케일이 부르자 그 부름에 부응하듯 그에게로 다가왔다. 최한은 비에 젖은 케일을 빤히 보다가 제 손에 쥔 것을 펼쳤다. 커다란 우산이었다. 여름임에도 오래도록 비를 맞은 몸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감기 걸려요."

 

"괜찮아."

 

최한을 바라보던 눈을 돌렸다. 그를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었다. 차가워진 몸이 열로 달궈지는 느낌이었다. 최한의 감정을 깨달은 순간부터 자각할 수 있었다. 저도 똑같은 것을 품고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더욱이 그를 볼 수 없었다. 심장의 활력이 움직일 때보다 더 크게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제 가슴에 손을 댔다. 최한의 눈빛에 걱정이 서렸다.

 

"들어가요. 추워 보이십니다."

 

케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일이 저택을 향해 걷기 시작하자 최한이 그의 옆에 붙었다. 우산은 케일 쪽으로 기울이고 저는 비를 다 맞으면서 걸었다.

 

"너 비 다 맞고 있잖아."

 

"괜찮습니다."

 

최한은 케일을 향해 눈을 접으며 웃었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올려 그것을 본 케일의 두 눈이 잠시 커졌다가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고는 홱 돌려버린 고개 탓에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최한은 영문을 알 수 없어 고개만 갸웃했다.

 

"들어가면 넌 네 방에 가서 옷 갈아입고 와. 그동안 씻고 있을 테니까."

 

"욕실까지 들어가시는 거 보고 가겠습니다."

 

"됐어. 너 그렇게 젖어있는 거 별로 보고 싶지 않으니까. 네 말대로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방문 앞에 다다르자 케일은 손을 휘휘 내젓고 안으로 쏙 들어갔다. 닫힌 문 앞에 잠시 서 있던 최한은 어쩐지 조금 축 처진 듯한 어깨를 하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

 

 

 

 

 

 

"미쳤네.. 미쳤어..."

 

케일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에 기대 주르륵 내려앉았다. 최한의 미소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한 번 자각해버린 감정은 시도 때도 없이 제 존재를 알려댔다. 차가워진 몸을 따뜻한 물에 뉘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대로 있으면 최한이 방에 들어와서 볼 텐데. 그렇게 생각하자 굳어있던 몸이 움직였다. 삐걱대는 몸짓으로 욕실에 들어가 젖어서 무거워진 옷을 벗고 욕조에 몸을 담갔다. 몸은 가벼워졌지만 마음만은 무게를 더해갔다. 따뜻한 물에 들어가 있으니 머리는 잠을 요구했다. 맞지 않는 삼박자에 케일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결국 머리가 이긴 것인지 눈이 점점 감겼다. 목욕하다가 잠들다니.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반쯤 떠져 있던 눈은 곧 무거운 눈꺼풀에 덮였다.

"케일 님."

 

최한은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케일의 방으로 향했다. 욕실에 계실테니 방 문은 두드려봤자 소용없을 거라는 생각에 노크도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조용했다. 왠지 문 쪽에 있는 카펫이 유독 젖어있는 것 같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욕실 문 앞에 멀뚱히 서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여기 있겠습니다. 아니면 방 밖에 서 있을까요?"

 

잠시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났다. 설마 안에서 무슨 일 있으신 건가? 저도 모르게 문고리를 잡아 돌리려는 순간,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들렸다. 곧 기다리던 목소리가 이어졌다.

 

"금방 나갈게. 안에 있어."

 

"네."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안 최한은 욕실 문 옆에 붙어 섰다. 호위하는 버릇이 몸에 배어버린 탓이었다. 케일은 최한의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답지 않게 당황해서는 욕조 안에서 허둥거리기까지 했다. 대충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고는 습기로 가득 찬 욕실에서 나왔다. 문을 열자마자 최한이 바로 옆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려던 걸 겨우 목 뒤로 삼켰다.

 

"여, 여기 왜 서 있는 거야?"

 

"네?"

 

"...아냐."

 

케일은 고개를 젓다가 발끝부터 타고 올라오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데워도 추운 것을 보니 감기가 오려나.

 

"머리 말려드릴게요."

 

"으응.."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에 앉았다. 최한은 조금 서툰 손놀림으로 물기를 털어냈다. 미적지근한 바람과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손길이 머리에 닿자 노곤해지며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고개를 꾸벅거리며 졸고 있자 뒤에서 작게 웃음소리가 들렸다. 케일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제 뒤에 있을 최한을 떠올렸다.

 

"조금만 더 말리고 침대에서 주무세요."

 

"...그럴 거야."

 

케일은 괜히 불퉁하게 대꾸했다. 이건 불가항력적인 거라고. 졸음은 어쩔 수 없는 거다. 거기다 아까부터 몸에 열이 오르는 게 아무래도 좋지는 않은 것 같다. 제 머리를 말리는 최한의 손을 잡아 멈추고 느릿하게 침대로 향했다. 잠과 열이 함께 오니 어지러웠다. 비틀거리며 테이블에 박을 뻔한 것을 최한이 손으로 붙잡아 면할 수 있었다.

 

"몸이 안 좋으신가요?"

 

"아냐. 그냥 좀.. 졸려서..."

 

케일은 이불 속으로 파고 들며 침대에 누웠다. 저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최한을 흐릿한 시야 너머로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암전이었다.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던데. 누가 만든 말인지는 몰라도 짜증 난다. 감기는 언제든 걸릴 수 있는 거다. 혼이 나간 것처럼 정원 한가운데에 서서 비 맞다가 걸린다든지. 그런다든지. 케일은 잘 떠지지 않는 눈을 겨우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마나 잠들어있던 거지? 한창 내리던 비는 그쳐있었다. 깜깜한 밤하늘이 그를 맞이했다. 벌써 밤인가.

 

"일어나셨습니까?"

 

옆으로 돌린 시선과 한 시선이 마주쳤다. 손에 물수건을 들고 어정쩡하게 멈춘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열에 들뜬 머리 때문에 기분마저 붕 뜬 느낌이었다. 귀로 들리는 모든 소리가 웅웅거렸다. 잠긴 목소리가 단조롭게 흘러나왔다.

 

"얼마나 됐어?"

 

"3시간 정도 됐습니다."

 

생각보다 그리 오래 자진 않았네. 공중에 멈춰있던 최한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혹여 불편할까봐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러운 손이었다. 온몸이 땀에 푹 젖었다. 기껏 목욕했는데 다 부질없어졌다. 최한은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모로 넘겨주었다. 자는 내내 끙끙거리며 뒤척거리던 걸 보았다. 열이 가득한 숨을 가쁘게 내쉴 땐 그 숨결이 제 가슴을 옭아매는 것 같았다. 그가 아픈 것은 제게 있어서 그 어떤 고통보다 힘들고 아팠으니까. 최한의 입꼬리가 일그러졌다. 케일은 애써 담담하게 그 표정을 외면했다. 목이 간지럽고 껄끄러워 기침이 나왔다. 간헐적으로 나오던 기침은 길게 이어졌다. 목이 더 아파왔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감기는 그냥 둬도 나아."

 

몸을 일으켜 앉아 침대맡에 등을 기댔다. 언제 떠 놓은 건지 제게 내미는 물컵을 받아들고 들이켰다. 미지근한 물이 넘어가는 것도 아팠다. 안이 부었나. 케일은 물컵을 다시 건네주고 이불을 꼭 그러쥐었다. 열 때문에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감당하지 못할 질문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입안에서 굴리던 말을 내뱉었다. 지극히 충동적인 짓이었다.

 

"최한."

 

"네. 케일 님."

 

"너 나 좋아해?"

 

케일의 물음에 눈에 보일 정도로 최한의 몸이 덜컥거렸다. 물컵을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 너무 직설적이었나? 질문한 케일의 상태도 비슷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전신이 떨렸다. 몸이 아픈 것 때문이라고 여겼다. 대답이 무서웠다. 만약 혼자만의 착각이라면? 그 쪽지도 사실이 아니라면?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무서웠다. 어쩌면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두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케일이 되기 이전에 저를 사랑해준 이들은, 제가 사랑한 이들은 저를 떠났으니까. 마음을 나눈 것을 그대로 들고 다시는 보지 못할 곳으로 가버렸으니까. 제가 줬다고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도려내 가져가버렸다. 그래서 무서웠다. 이곳에서 다른 이들에게 나누고 남은 마음을 모두 제 눈앞의 사람에게 주어도 되는 것인지. 또, 떠나는 것은 아닌지. 케일의 눈이 불안과 초조, 그리고 온갖 감정이 점철되어 떨렸다. 질문과 대답의 간극이 길어질수록 숨도 가빠왔다.

 

"케일 님."

 

단단한 손이 어깨를 붙잡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케일은 어느새 침대에 걸터앉아 저를 바라보는 최한을 응시했다. 최한은 입술을 달싹이며 머뭇거리다 숨을 내뱉듯 답을 흘려보냈다.

 

"좋아합니다."

 

"..."

 

"사랑해요, 케일 님을."

 

"...최한."

 

"그러면 안 되는 거 알고 있어요. 케일 님 옆에 있으면서 그런 감정을 품는다는 건..."

 

케일은 멍하니 그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정답이었다. 자신이 보았던, 느꼈던 것은 사랑이었다. 그래. 이제 발을 뺄 수도 없다.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기에. 제 남은 마음을 주어도 될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그의 것이 되었다.

 

"왜 안 되는데?"

 

"네?"

 

"돼."

 

"..."

 

"그런 감정 품어도 된다고. 나도 마찬가지니까."

 

케일의 말에 최한은 조금 전까지 케일이 짓고 있던 표정과 똑같은 얼굴을 했다. 곧 그 얼굴은 울 듯이 일그러졌다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웃음을 지었다.

 

"케일 님."

 

"어."

 

"사랑합니다."

 

"그래."

 

"사랑해요."

 

"나도."

 

케일은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런데도 최한은 활짝 웃었다. 긍정의 답이라는 게, 저와 같다는 게 너무나도 행복해서. 케일은 잔뜩 긴장해있던 몸에 힘이 풀리는 걸 느끼며 최한의 품 안으로 쓰러지듯 기댔다. 안 그래도 뜨거운 몸이 더욱 달아올랐다. 밭은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한아."

 

"...네."

 

"감기는 말이야."

 

케일은 뒤에 이을 말을 생각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옮기면 낫는대."

 

그 말을 끝으로 최한의 옷을 잡아 끌어내려 입술을 겹쳤다. 최한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진 케일은 밀려오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눈이 감기고,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축 처지는 제 몸을 받쳤다.

 

"잘 자요. 사랑해요. 케일 님."

 

다정한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아주 깊고, 편안한 잠에 빠졌다.

  소나기에 조금씩 젖어가듯 너라는 비에 알아채지 못하게 젖어갔고, 곧 너는 장마가 되어 쏟아 내렸다. 나는 눈 깜빡할 사이 너에게 잠식되었다. 너라는 비에 완전히 젖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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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___ fin.

불멸

@no_ending_91

[ Rain Equa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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