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워놓은 작은 협탁 달력을 한스가 뜯었다.
한스는 사교성이 좋은 자였다. 착실하게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짧은 잡담을 나누고 쉬이 활기찬 분위기를 자아내곤 했다. 가령 달력을 뜯었다는 별거 아닌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소재가 이어지고 이어져 결국 주변 사람들이 미소 짓게 했다. 한스의 장점이었다. 벌써 6월이구나. 작은 잡담 소리가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책등을 손으로 쓰는 케일에게도 간간이 들렸다. 빗소리에 섞여 그 소리가 듣기 나쁘지 않게 방을 울렸다.
곧 눅눅해지겠네요. 진저리를 치는 목소리에 달래는 듯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답변했다. 왜 그래. 여름이잖아. 비도 오고 하면 시원해지겠지. 또 다른 목소리가 그 말을 이었다. 저는 비 오는 게 좋기도 한데, 싫어요! 신발이고 양말이고 젖는 기분 완전 별로 아니에요? 게다가 빨래도 잘 안 마르고, 기분도 괜히 싱숭생숭해지고 하여튼 좀 그래요. 아무래도 막내였는지 목소리가 어렸다. 그래서 그런 투정도 마냥 귀여운 듯 그 뒤로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혀서 그런지 투닥거리는 소리가 비에 쓸려 가라앉았다.
툭, 투둑. 투두둑.
비가 집요하게 창문을 두드렸다. 부수기라도 할 정도로 위협적으로 벽을 적셨으나 벽은 미동도 없어 보였다. 결국, 그것은 비일 뿐이었고 케일은 벽 안에 있었다. 케일을 적실 일은 없었다. 앞으로도. 케일은 말라 있을 것이다. 케일은 밖에 나가는 것을 그렇게 선호하지 않았고 벽은 단단했으며 눅눅한 것은 취향이 아니었다. 아까 귓가에 울리듯 들려온 막내의 목소리에 케일은 속으로 동의를 표했다.
그렇지, 비는 별로다.
이 녀석, 그냥 그건 비 내리는 게 싫은 것뿐이잖아. 좋은 점은 하나도 없고.
두들기는 빗소리 사이를 장난스럽게 타박하는 목소리가 뚫고 흘렀다. 아잇, 말을 끝까지 들어보라니까요. 궁지에 몰려 목소리를 높여 툴툴대는 목소리 또한 그 뒤를 이었다. 축축한 걸 누가 좋아하겠어요. 걸어 다니는 감각에 질퍽 이는 느낌이 드는 건 싫죠. 무거워진 몸은 내 생각대로 움직이지도 않고, 기분도 들쭉날쭉하죠.
하지만 비는 사람을 홀린다고요.
나는 분명 비를 싫어하는데 그걸 마주하고 있으면 우산을 내던지고 나가서 잔뜩 젖어도 상관없을 기분이 된다니까요? 비만 오면 이상해지는 어떤 회로가 사람한테 있는 게 분명해요.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이상한 생각이 들 리가 없단 말이에요. 세상에, 어느 누가 비를 그냥 맞고 온통 젖어버리는 게 상식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겠어요? 근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점은. 막내는 두다다다 두서없는 말을 내뱉고는 숨이 차는 듯 말을 끊고는 숨을 골랐다.
그게 싫지 않다는 점이에요. 그 기분이 나쁘지 않단 말이죠.
젖어들어 가는 것이 어째서 기분 좋은 일이 되는가?
케일은 되도록 그 행위를 피하고 싶었다. 케일은 편히 쉬고 싶을 뿐이었다. 굳이 나서서 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단순히 기분 좋을 뿐이라니, 별로 효율적인 이유도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그저 눈을 감아버리면 될 것이었다. 두드리는 빗소리를 자장가로 삼으며.
그러나 케일은 느리게 창문을 쓸었다. 진동이 느껴졌다.
두껍고 작은 세계. 케일의 작은 상자는 무너질 일이 없다.
그 세계는 케일을 감싼 채로 유동적으로 움직인다. 공허하게 넓고, 숨 막히게 좁은 세계.
케일이 정의한 벽.
케일은 그 벽을 쓸었다.
***
케일 헤니투스는 작지도, 왜소하지도 않았으나 그렇게 느껴지게 하는 아이였다.
커다란 크림색 가디건을 몸을 감싸듯 입고 느슨하게 땋은 붉은 머리를 어깨에 늘인 채로 복도를 걷는 모습은 이질적이었다. 중상위권에 머물러 있는 성적에 수업에 잘 참여하는 학생도 아니었고 반 아이들 모두가 케일 헤니투스라는 붉은 점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가까이 지내며 속을 터놓는, 세간에서 말하는 친구라고 불릴만한 존재는 없었다. 헤니투스에게 있어 그들은 반이라는 공간을 공유하는 클래스메이트이자 그저 지나쳐가는 순간의 배경을 채울 것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친해지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의 뇌리에, 눈에 박히고 싶어 안달 난 것들은 그 아이를 주목하며 말 한 번을 건네려 애썼다. 사람의 눈을 뺏는 기이하고 기묘한 클래스메이트. 하지만 그 아이는 안타깝게도 모두의 기대와 바람을 외면하고 창밖만을 보았다. 그는 그 공간에 있는 모두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의도적으로 관심을 배제하는 태도로도 보였다. 어떤 아이들은 아예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다고도 평했다.
그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갖은 노력에 쓴맛만을 맛본 아이들은 케일 헤니투스를 굉장히 오만한 아이라며 혀를 내두르고 말을 걸려고 애쓰는 헛된 짓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그 아이의 기묘한 인기 자체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
지금의 기억에도 앞으로의 기억에 남지 않을 인연들. 케일은 부러 그들의 이름도 묻지 않았고 얼굴도 외지 않았다.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낯선 존재들이 같은 공간을 부유했다. 그것들은 케일의 주위를 돌았다. 시야에 담기고 싶은 것이다. 분명한 호의와 의도가 담긴 배회임에도 그러나 케일은 눈길 한 번을 건네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 그 희끄무레한 낯선 것들이 자리해 있다면 눈을 감아버렸다.
굳이 그렇게 야박하게 굴 필요가 있어? 속에서 들끓듯 무언가가 물었다.
조금은 다정하게 굴어도 좋잖아. 아직 저 아이들은 어리고 예쁘게 잘 빚어진 흥미로운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거야. 아이들을 좀 배려해 줘.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면 되잖아. 또 혹시 몰라? 스쳐 지나가는 많은 것들에 미련이 젖어들 무언가가 있을지. 케일은 제 옆의 창가를 흘끔 보았다. 미약하게 창문을 스치는 빗방울이 흔적을 남기며 사그라들었다. 괜찮아. 케일은 창문이 굳게 잠긴 것을 확인했다.
작게 안심하듯 숨을 내뱉고 들이쉬는 숨이 찼다. 습기가 느껴졌다. 비의 향이 기관지를 적셔 들었다.
"유령과 무슨 말을 하지?"
목소리에 냉기가 서렸다. 미약했던 빗방울이 순간 천천히 세기를 올려 공간을 집어삼키듯 울렸다. 창문 사이로 진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창문 바깥으로 약한 빗방울에 방심해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걷던 아이들의 시원한 비명이 들렸다. 빨리 들어가! 다 젖어버린다고! 뒤이어 시끄럽게 깔깔대며 웃는 소리가 비에 섞여 흘러내렸다. 케일은 그들을 창문 아래로 내려다보며 빈 교실에서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웃지도 울지도 않는 애매한 표정. 그 표정은 아이에게서 나오기는 어려운 깊이가 있었다. 등은 그 어느 순간보다 왜소해 보였다.
비의 내음, 귀를 짓이기는 서늘한 소리가 팔뚝에 감겨들어 살을 바짝 서게 하여 놓았기에 케일은 가디건을 단단히 여몄다. 그런데도 냉기가 가시지 않아 담요를 찾기 위해 하얗고 마른 손이 책상을 더듬었다. 가디건 안의 하복에 걸린 명찰이 달각거렸다. 겨우 찾은 담요의 촉감이 부드러워 케일은 잠시 찬 손을 담요로 감싸 쥐고 있었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이불을 뒤집어쓰듯 그것으로 몸을 단단히 감싸고 고개를 파묻었다.
익사한 시체와는 어떠한 말도 나눌 수 없다. 이미 생명이 바스러진 존재와 무슨 담소를 나누겠는가.
케일은 자신이 걸터앉은 자리의 주인을 떠올리려 애썼다. 가물가물했다. 여학생인 것도 같았다. 그러나 얼굴이 번진 것처럼 일그러져 이목구비를 떠올릴 수 없었다. 이러면 누군지 분간할 수 없다. 떠올리려고 애써도 결국 흐물한 물 번짐만 더 짙어져 케일은 결국 자리의 주인을 찾는 걸 포기하였다.
꽈르릉, 번개가 쳐 불 꺼진 교실에 불이 들어온 듯 번쩍였다. 케일에겐 우산이 없었다. 론이 픽업해주기로 했으니 큰 우려는 없다. 론이라면 우산 정도는 챙겨올 테니까. 불 꺼진 교실에 있는 것은 케일 나름의 오기였다. 산 자와 죽은 자, 그 사이의 간격. 여름은 괴담이 들끓을 계절이다. 케일은 이러고 있으면 아주 잠깐이라도 그 간격이 줄어들 순간이 찾아오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그렇다면 당사자에겐 기쁘기보단 살짝 오싹한 순간일 테지만.
이것은 결국 바스러지지 못한 원한 같은 거겠지.
그러니 이 여름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익사해 빗속에 머무는 유령이 발을 질질 끌며 교실을 부유했다.
-
으아악!
케일은 잠시 잠이 들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불 꺼진 교실이었다. 휴대전화의 알람을 알리는 등불이 깜빡이고 있었다. 아마 확인하지 않아도 론일 것이다. 케일은 아직 켜지지 않은 화면을 느리게 쓸었다. 비 오는 날에 어깨가 젖도록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느린 발을 질척이며 교실을 빠져나오자 아직 가지 않은 아이들이 색색의 우산을 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번개에 이어 다가오는 천둥 때문이겠지. 번쩍, 그리고 아주 짧은 정적. 다시 한 번 아이들의 비명이 복도를 울렸다.
케일은 두 사람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마주 봐야 또 마르지 않은 그림에 붓으로 덧칠한 것처럼 엉망으로 번져있을 것이다. 내려간 가방끈을 다시 바짝 올려 메고는 아이들이 걸어가는 복도 끝 계단으로 한 발짝 먼저 내려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톡톡. 뒤에서 우산 끝으로 바닥을 내리치는 소리가 빗소리에 맞춰 경쾌하게 울렸다. 아이들은 함께 하는 이야기 소재에 열중하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가도, 다시 번개가 신호를 보내면 다시 목소리를 높이고 서로의 비명에 즐겁게 깔깔거렸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에 열중했다.
있잖아. 이렇게 비 오는 날 학교를 걷고 있으면 귀신 같은 게 나타나지 않을까?
어우, 무서운 소리 하지 마라.
사실 하나도 무서운 게 없다는 투로, 오히려 흥미진진하다는 투로.
먼저 앞서 걷는 아이의 얼굴에서 건조한 미소가 번졌지만, 뒤에 걷는 아이들에게 닿을 리가 만무했다.
나는 그런 거 싫어. 한 아이의 투정 부리듯 한 목소리가 들렸다. 귀신 같은 건 음침하고, 어두침침하잖아. 분명 완전 징그럽게 생겼을 거 아냐? 음, 그렇지. 대충 귀신을 생각하면 그런 이미지가 아닐까. 인간에게 공포를 안기는 미지의 존재는 마주 보는 상대에게 호감을 주는 상은 전혀 아닐 테니.
귀신이 잘생기면 어쩌려고?
그럼 미친 척하고 말이라도 걸어보지 뭐.
야! 너 그러다 큰일 나! 별거 아닌 농담에도 헤프게 터지는 웃음소리에 케일은 혀를 내둘렀다. 외모가 보기 좋으면 경계를 풀어도 되는 건가. 산 것이 아닌 것이 주는 위화감은 겨우 외형뿐만은 아닐 터인데. 태평하네. 긍정적이고. 바닥에 밟히는 차가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오래된 학교인지라 나무 바닥이었다. 론이 중앙에 서 있다고 메세지를 보내 왔으니 중앙계단으로 가는 편이 빠를 것이다.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손에 쥐어진 계단 손잡이가 찼다. 그에 소름이 오소소 돌았다. 끼익, 끼이익. 계단이 짓눌러진 채로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덜걱였다. 창문 사이로 눈을 찌푸리게 하는 빛이 몇 번을 깜빡이더니 계단을 흔들릴 정도로 쿠르릉 거리며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사납게 내리치는 빗소리가 듣기만 해도 몸이 시렸다. 케일은 울부짖는 소리에 이어 들리는 소리가 공백이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젖혀 뒤를 보았다. 따라오는 인파가 없었다. 아마 복도 끝으로 가는 것 같았으니 거기로 가버린 듯했다. 간간이 들리던 목소리가 있었던 것 같으면서도 이미 빗소리에 삼켜져 설사 아직 두 사람이 계단을 내려가지 않았다고 해도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
케일은 정말 홀로 된 기분이었다. 소나기만이 내려앉은 그 공간엔 케일만이 있었다.
무서운가?
무서운 건 아니었다. 케일은 그런 것에 겁을 먹기엔 지나치게 말라 있었으므로.
그저 비어버린 복도의 찬 공기가 씁쓰름했다.
내려가는 계단의 삐걱거림이 여전히 시끄럽게 발을 쫓았다. 그 소리가 발목을 잡고 손톱을 세워 긁는 듯이 소름 끼쳤다. 번개가 교정을 파고드는 순간이 아니고서야 복도를 내려가는 중앙계단은 어두웠다. 새로이 마주한 층은 고요하고 또 그 고요함이 섬뜩했다. 목에서 바짝 소름이 돋았다. 무서운가? 스스로 다시 자문해봤지만 공포가 몰려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기분이 나빴다.
복도에 발을 딛고 다른 층으로 다시 내려가기 위해 다시 계단으로 발을 디뎠다. 론을 마주하면 우선 이 찬 기를 어떻게 해주겠지. 론이라면 적어도 따뜻한 차라도 내어주고 걸칠 것이라도 준비해 줄 것이다. 레몬이 아니라면 좋을 텐데. 억지로 입안에 배인 신맛을 다셔가며 케일은 팔뚝을 쓸었다. 삐걱, 삐걱. 소름은 아무래도 공포에 가깝기보다는 한기가 돌아서에 가까웠다. 춥다. 비바람이라도 들어오나? 창문은 분명히 다 닫혀있을 텐데.
쏴아아아. 천둥 사이로 집요하게 귀를 두드리는 소리가 퍽 공격적이었다.
우산 없이 저 비를 뒤집어쓴다면 금방이라도 살갗이 모조리 뚫려 뭉개지고 형태도 알아보지 모를 정도로 지독하게 내리쏟아졌다.
그런데도 오랜 빗소리에 귀가 멀어 있어 케일은 그저 이 순간이 공허한 정적처럼 느껴졌다. 일정하게 창문을 두들기는 비가 내리는 소리는 이미 퍽 익숙해져 귓가를 더는 거슬리게 하지 않았으니까.
끽.
삐걱.
끼익.
삐걱.
또 다른 계단이 짓눌리는 소리가 나기 전까지는.
케일은 지금까지 내려온 계단의 뒤편을 올려다보았다. 고요했다. 같이 내려오던 무언가의 불협화음이 발걸음을 멈추자마자 같이 멎었다. 그리 먼 곳에서 난 소리가 아니었으니 기껏해야 1, 2층 사이의 소리였을 것이다. 케일은 인기척을 훑었다. 빗소리 덕에 그것을 판별하는 것이 어려운 것을 알지만 그런데도 그것을 찾으러 부러 뒤를 돌아 위로 올라서기 시작했다. 끼익. 끽. 소리가 들리자마자 연달아 삑, 삐걱. 하고 다시 소리가 들렸다. 이런 질 나쁜 장난을 계속하겠다는 건가? 케일은 이런 놀이에 흥미가 그렇게 없었다. 겁을 집어먹을 처지도 아니었다. 사람을 골라도 단단히 잘못 골랐나. 얼굴을 마주한 꼴이 볼 만 하겠군. 이런 장난을 치는 인간이라면 그리 대단치 않을 인간일 것이다.
아니, 설사 그것이 맞다고 해도 두렵다고 계단 아래로 내달릴 필요를 케일은 느낄 수 없었다.
성큼성큼, 그 수식어에 걸맞게 케일은 계단을 올랐다. 망설임 없이 밟는 발아래에서 거친 삐걱거림이 일었다. 따라잡는 것은 금방이었다. 어지럽게 지나쳐가는 계단 위, 그 발걸음이 몇 번이고 함께 불협화음을 내달릴 때쯤, 케일은 순간 발을 멈췄다. 표정이 굳은 채였다. 얼굴에 망설임이 일었다. 애매한 계단 자리에 높이가 다른 계단에 발을 얹어 놓고 한참을 멈추어 있다가 다음 계단으로 발을 옮겼다.
끼익.
삐걱.
어째서 목이 바짝 마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 소리는 점점 멀어지지 않고, 가까워지고 있었다. 케일이 하는 것은 추격전이 아니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케일은 부러 소리를 더 크게 내어 계단을 올랐다. 삐그덕.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발걸음은 여전히 덤덤했다.
서로 가까워져 오는 집요한 삐걱거림에 케일은 두렵다고 느끼지는 않았으나 목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본능적으로 경직된 것이다.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점점 위로 올라서는 것에 거부감이 들기 시작했다. 한기가, 창문도 열리지 않았는데 가까워져 가는 만큼 점점 질척하게 온몸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몸이 긴장한 것은 그 탓이다.
다가갈수록 몰려오는 것은 공포가 아닌 긴장감이었다.
분명 더 올라가면 위험할 것이다, 그런 속삭임이 이명처럼 울리는 듯했다. 머리가 그렇게 절박하게 비명을 외침에도 케일은 계단을 한 칸 더 올라섰다.
그래야 할 것만 같았으니까.
충동이 그리하라 일렀다.
복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복도. 그렇기에 따각, 따각. 복도를 배회하는 소리만이 공간을 전부 채웠다. 벽을 짚고 쓰는 손끝이 꺼끌꺼끌했다. 케일은 순간 여기까지 애써 발걸음 한 것이 무의미한 것이라는 것을 설풋 깨달았다. 무얼 기대했단 말인가. 유령? 어쩐 한낮 소문에 가까운 무언가를 찾아 헤매야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벽을 쓸어내리던 손이 이내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가슴이 텅 빈 듯한 기분에 케일은 떨군 손으로 제 가슴을 짓눌러 문질렀다. 우스웠다. 복도를 지나쳐간 아이들의 이야기에 관심 없는 척 먼저 걸어가 놓고서 이 꼴이라니. 사실 그 누구보다 그런 괴소문에 매달리고 있었던 것은 스스로가 아닌가. 자신을 향한 조소는 썼다. 내려앉는 빛이 또다시 천둥을 예고했다. 케일은 바닥의 제 발을 향한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이제, 귀를 먹먹하게 할 이명이 이 공간을 채우면 케일은 등을 돌려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다.
론이 있는 곳으로. 적어도 론은 같잖은 괴소문보다야 훨씬 오싹한 늙은이지만 적어도 얼굴은 제대로 박혀있지 않은가.
콰과광.
세상엔 산 것과 죽은 것이 있다고들 하지.
케일 헤니투스는 그 중 어느 것도 해당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산 자의 얼굴들은 일그러져 결국 닿지 않았다. 누가 누구인지 특히 케일의 삶에 불필요한 자들의 얼굴은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 도무지 기억할 수 없었다. 아마도 케일의 속껍질 안에 썩어들어가는 원혼의 부작용일 것이다.
그는 산 자이자 죽은 자였다. 그 어느 축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수없이 뒤섞이고 응고된 채로 분리조차 할 수 없는 기묘한 존재로 남았다. 케일 헤니투스는 살아가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스스로 뒤섞임을 택했다.
죽은 것들이라고 그를 이해해 줄까?
케일은 결국 소리가 나도 복도에서 내려가지 못했다.
빈 복도에 다시 빛이 들었다.
이 교정 내의 유령은 케일 헤니투스다. 얼굴이 번져 보이지 않는 학우들도, 은근히 번져나가는 오싹한 소문의 주인공들도 아니다. 비에 젖어, 바다에 빠져 익사 당한 시체 그 자체이면서도 살아있는 몸은 한없이 건조한 상태의 유령. 그것은 그가 정의하고 만든 케일 헤니투스였다.
케일은 이 몸을 다시 물에 적실 생각이 없었다. 그럴 만한 가치를 느끼지 못했으니까. 살아있는 사람과 대화를 하고, 인연을 소중히 하고. 예전의 삶처럼 적셔가고 젖어들어 가는 순간. 자신의 공간에 다시금 물이 새어드는 걸 케일은 바라지 않았다.
케일이 그대로 서 있는 한 켠의 창문은 학교의 정문을 비추고 있었다. 아까의 그 두 명인 것 같은 아이들이 비에 물든 창문 사이로 하교하는 것이 보였다.
케일은 빗방울이 창가에 고여 느리게 굴러떨어지는 것 마냥 가는 손가락으로 창문을 쓸어내렸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살아있는 자들이 유령과 무슨 말을 하겠어."
그 목소리는 감기에라도 걸린 것 마냥 낮게 깔려 있었다.
작고 가녀린 소년에게 나올 수 없는 침잠된 목소리였다.
지나치게 질긴 생명은 또 홀로 남았다. 살아남고, 또 살아남고 결국에는 모든 인연이 바스러질 때까지. 그는 그에게 있어 가장 끔찍한 운명을 집어삼켰다. 수도 없이 반복되는 인생. 본인이 아닌 다른 자에게 기생해 목숨을 연명하며 지속해 나가는 삶.
그는 케일 헤니투스를 자처했다.
이름을 그리 칭하고, 머리를 붉게 물 들이고 길게 늘인다고 할지라도 돌아오는 것은 없는데도.
원한만이 남아 부유할 유령의 잔재일 뿐이다.
콰르릉.
다시 한 번 번개가 치는 소리가 케일의 어깨에 닿아 그는 몸을 흠칫 움직였다. 케일은 차가운 창문에 덴 이마를 느리게 떼고 빈 복도에서 내려가기 위해 몸을 틀었다.
느린 위화감이 들었다. 빗소리가 창문 밖으로 흐르는 것이 아닌 더 가까운 곳에서 쏟아지고 있는 듯한 거리감이 들었다. 그 소리에 예민하게 귀를 기울이니 분명하게 등 뒤에서부터 점점 커지고 있었다.
툭, 투둑.
투두둑. 투두두두둑.
쏴아아아아.
등 뒤가 축축하게 시렸다. 비바람이 들어오고 있다는 증거였다.
케일이 뒤를 아까 전 확인 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분명히 닫혀있었을 터인데.
아, 분명 고개가 돌아가는 소리일 텐데 귓가에 쇳소리처럼 긁는 소음이 터지는 착각이 들었다.
완전히 몸을 뒤돈 상태의 소년이 창문이 활짝 열려 비가 내리치는 복도를 마주했다. 수없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인지 복도 바닥에는 이미 물이 흥건히 고인 채였다. 한 걸음 걷는 물에 겉이 젖어 반짝이는 구두 아래 찰박. 하고 물구덩이가 느껴졌다. 걷는 속도가 서서히 빨라졌다. 창가 틀을 더듬대며 열린 창가의 끝을 찾아 헤맸다. 어디서부터 열려 있는 것인지, 그 끝에는 무엇이 있는 것인지.
어느 부근에서부터는 창문이 열려있지 않았다. 이미 열린 창문을 따라 걸어온 케일의 꼴은 엉망이었다. 머리칼은 측면에 쏟아진 비 덕분에 축축하여진 지 오래였고 교복은 물기를 집어삼켜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더듬은 교복 앞섶이 뭉근하게 젖어있는 것을 확인한 케일은 작게 웃었다.
케일의 벽은 무너진 적이 없었다.
케일의 상자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뚫리지도 않았고 무너진 흔적도 잔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케일 헤니투스는 흠뻑 젖어있었다.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상대는, 애초에 그 세계를 거대한 충격으로 부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케일이 스스로 그 벽을 열어젖히게 한 것이다. 이미 케일의 웃음은 몸 전체를 들썩일 정도로 그 강도와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배를 부여잡고 그대로 바닥으로 무릎을 꿇었다. 감정이 통제되지 않아 몸을 다시금 세우는 데에도 몸이 비틀거렸다. 누군가가 보면 상당히 기괴한 행태였다. 마치 괴담의 한 구절같이.
물에 젖어 얼굴에 들러붙은 붉은 머리, 끊이질 않는 깔깔대는 목소리. 몰아치는 비바람.
번쩍.
불규칙하게 반복되는 천둥·번개.
그 빛 사이 번쩍이는 한 쌍의 눈.
눈이 마주치자 그 인영은 쓰게 웃었다. 아니, 인영이 아닌지도 몰랐다. 인영이라기에는 그것은 수도 없이 공간을 지배하는 빛 사이 홀로 그림자가 없었다. 제대로 바닥을 딛고 서 있는 지도 불분명했다. 이미 비바람은 들이치는데도 그보다 더한 한기가 주변에 맴돌았다. 오한에 몸이 떨렸으나 케일은 제 팔뚝을 힘주어 붙잡은 채로 눈을 떼지 않았다. 지나친 힘이 몰린 듯 손아귀가 하얬다.
잠깐 스쳐 지나가듯 비추는 얼굴의 윤곽은 수려했다. 빛을 전혀 받지 않은 눈은 밤이라도 내린 듯이 어두컴컴했으나 빛이 닿은 부근은 연한 하늘색을 연상시켰다. 바람이 이리 부는데도 전혀 젖지 않은 머리칼은 빛을 발한 부분만이 금발처럼 반짝였다. 객관적으로 미인이라 통칭할 수 있는 외모, 바짝 선 코. 그림으로 그린 듯한 뚜렷한 이목구비. 현대와는 전혀 맞지 않는 화려하고 고급진 옷가지와 장신구가 그것의 움직임에 따라 절걱였다.
그래, 그것은 두렵다고 느끼기에는 너무나도 호감을 줄 만큼 미형인 외형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이 살아있는 무언가는 아니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또렷한 얼굴이 그 위화감을 더욱 들끓게 했다. 속을 게워내고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익숙한 몰골의 그것은 하얀 제복에, 붉은 망토를 두르고.
그것이 살아 있을 리가 없다.
이 자가 살아 있을 리 만무했다.
"케일."
그것은 분명.
***
론은 시간이 늦을 때까지 내려오지 않는 도련님의 모습에 표정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초조해 하고 있었다. 이런 적은 드물었는데. 시계를 살피며 같이 초조해 하는 검은 우산 아래의 운전기사와 함께 론은 마른 침을 삼켰다. 케일 헤니투스는 학교생활을 쉬이 피곤해했기 때문에 학교가 끝나자마자 론에게 빠르게 달려오곤 했다. 케일의 주변에 거의 유일하다시피 또렷한 얼굴로 남아있는 시종. 악몽을 꿀 때면 론이 케일의 곁에 붙어 손을 잡아주곤 하는 것이 도움되었기에 론 몰란은 항상 곁에 붙어있었다.
론은 항상 케일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비가 이내 격해지는 것을 느끼며 론 몰란은 장갑을 낀 손을 더 굳세게 쥐었다.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올라가 볼 생각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위험이 있다면 보호하는 것이 론 몰란의 일이었으므로. 운전기사가 머뭇거리는 것을 뒤로하고 론 몰란은 빗길을 가르며 나아가려 했다.
다행히도, 론 몰란의 도련님은 론이 들어가기 전에 학교에서 뛰쳐나왔다. 안부를 살펴야 했기 때문에 론은 급히 발을 움직여 가까이 다가섰다. 온통 젖어있었다. 방금 건물 안에 나왔을 터인데, 머리칼이 젖어 제멋대로 엉켜 엉망이었고 오랫동안 비를 맞은 듯 입술은 파르랬다. 머리칼 뿐만이 아니라 온 행색이 모조리 젖어있었다. 론은 그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케일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팔랑거리듯 흩날렸다.
"도련님, 이게 어떻게.."
늙은 하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당혹스러움이 묻어있으니 금세 본인의 페이스를 찾았는지 다시 덤덤히 사람 좋은 미소를 띠었다. 론은 말없이 멍한 듯 대답 없는 케일의 물기를 털어내 주었다. 얼굴에 묻은 물기가 적어도 빗물만은 아니라는 것을, 론은 볼을 쓸면서 눈치챘다.
케일은 흔들리는 눈으로 론을 올려다보았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는 몰라도, 그것은 케일에게 있어 타인일 수 있는 존재에게 잠시 기대어 오는 행동이었다.
론은 참으로 오랜만에 도련님의 표정에서 웃음이 번지는 걸 보았다.
온전히 기쁨으로 물든 표정이었다면 기쁠 것이나 그 얼굴은 그러지 못했다. 수없이 많은 감정이 교차하여 억눌러지고 뒤섞여 압축된 것의 결과가 웃음이었을 뿐이었다. 혼란스러움으로 뒤섞인 표정은 허탈한 웃음소리를 야기했다. 힘이 빠져 흐느끼는 것과 별반 차이 없는 웃음소리가 론을 향했다.
"론."
"예, 도련님."
"그게, 있었어."
케일의 몸은 계속해서 젖어가고 있었다. 운전기사가 급하게 달려와 엉망인 꼴의 케일에게 우산을 씌워주려 건넸지만, 케일은 손으로 그를 물렸다. 거리를 유지하게 했다. 론은 그 행동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몸을 낮춰, 마치 두 사람만이 이야기할 수 있는 거리를 좁히는 듯 굴었다. 부러 이러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 말입니까."
"그래, 그거."
케일은 마찬가지로 빗소리에 묻혀 두 사람만이, 아니 다시 말하자면 한 사람과 한 형체만이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낮췄다. 어차피 잘리면 달라질 운전기사, 그들이 케일의 모습을 어찌 보든 어떻게 판단하든 사실상 그리 큰 상관은 없었으나 이유가 있다면 그저 그러고 싶어서였다. 어차피 들어도 이해하지 못할 우리만의 괴담이 아닌가. 설명은 피곤한 법이다.
케일은 론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남들이 보면 그것은 그저 비 오는 허공에 목을 숙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알베르가 나왔어. 론."
....
이 기묘한 현상은 꽤 오랜 기간 동안 꾸준하게 발생했기에 필자는 현상을 수집하고 파악하는데 긴 시간을 투자했다. 36년, 기이한 괴담의 주기는 항상 같았다. 언젠가 이 몸이 노쇠해 더는 펜을 쥘 수 없는 순간이 온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 괴담은 계속 그 주기와 함께 살아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하나가 이 기이한 괴담에 필자처럼 매료되어 그의 실체를 계속해서 파헤쳐 나가주기를 바라며, 서문을 마친다.
....
나는 기록으로 열 세 번 째에 해당하는 케일 헤니투스를 결국 수소문 끝에 찾을 수 있었다.
그동안 이 괴담은 상당히 인지도가 올랐기 때문에 본인을 케일 헤니투스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수소문하는 내내 자주 있었다. 그러나 자주 떠도는 소문에는 구멍이 있었고 어폐가 있었기에 자처하는 사람 중 거짓을 걸러내기는 쉬웠다. 그와 별개로 수소문하던 나는 모두 가짜라는 것에 여러모로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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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일 헤니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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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케일 헤니투스`라 자처한다. 본래 이름과 성별, 인종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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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일 헤니투스는 로운 역사책에 나오는 인물로서 로운이 오래전 제국으로 번성했을 시기에 `영웅`이라 불렸던 헤니투스 백작가의 자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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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일 헤니투스가 역사책에 묘사된 대로 그들은 머리칼을 붉게 물들이고 길게 늘이는데, 그 머리칼이 오히려 지나치게 잘 어울리는 감이 있어 주위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자아내게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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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몰란`이라는 존재가 함께 있다고 그들은 주장하며, 자주 그 존재와 혼잣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론 몰란`이라는 자의 기록은 대부분 그들의 주위 사람들의 인터뷰에서 발견할 수 있었는데 60대 언저리의 희끗희끗한 반백발을 한 자로 그들이 종종 `론 몰란`과 하는 대화로 인해 집사와 같은 위치임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다른 자들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으며, 주변인은 대부분 그들이 미쳤기에 헛것을 본다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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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곁에 사람을 두지 않고 대부분 시간을 홀로 지냈다고 한다. 항상 젊은 나이에 요절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하는 데 기분 나쁜 우연이라면 우연으로 그들이 요절하는 나이는 서른 여섯, 그리고 그 사인은 언제나 익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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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잘 알려지지 않은 소문인데 거의 유일하게 하나의 인터뷰에서만 그 이름이 거론되었다. 이후는 기록 상 첫 번째 케일 헤니투스의 하수인이었던 한스 그레페터와의 면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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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음소리]
ㅡ 저는 그 집의 부 집사로 일했습니다. 사실상 집사 일에 다름없었지요. 집사는 `론 몰란` 이라는 자라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20년을 가까이 일하면서 그자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다른 집사 보조들도 그렇다고 하덥니다. 제가 부집사가 된 것은 순전히 이름 덕분이었습니다. `한스`라는 흔해빠진 이름이 마음에 든다고 했습니다. 어린 날의 저는 승진이 빠른 것에 마냥 기뻐하며 그 집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요. 모실 건 도련님 한 분뿐이었으니까요. 아직 도련님이 어릴 적에, 그러니까…. 여전히 `집사`를 찾으셨지만 그래도 더 멀쩡하던 순간의 어린 도련님은 비를 무서워하셨습니다. 저희는 비가 오는 날이면 급하게 문을 걸어 잠가야 했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도련님은…. 항상 비가 오는 여름이면 비를 쫄딱 맞고 들어오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놀라 헐레벌떡 몸을 씻겨드리는 순간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저희의 정성이 무색하게 그 다음 날이면 도련님은 비를 또 맞고 오셨죠. 여름 장마 기간만 돌아오면 도련님은 어딘가 나사가 빠진 톱니바퀴를 연상케 했습니다. 무언가 마주한 듯 아연한 표정으로 들어오는 도련님에 우리는 항상 엉망인 꼴의 장마를 보내야 했고 그런 여름은 제가 도련님을 모시는 내내 수도 없이 반복되었습니다. .......... 그 말이 아직도 뇌리에 박혀 떠나가지 않습니다. 한스, 고양이를 좋아해? 집사장이 되고 싶지 않아? 이상하네.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다고. 내 기록에선 그러지 않았는데…. 넌 한스지만 한스가 아닌가 봐? 한스는 좀 더 시끄럽고, 겁도 없이 기어오르고……. 그래 지금이 몇 년이지? 1781년…? 781년이 아니고? 아, 이상하네. 정말 이상해…. 지금이 천 년이나 지났다면….
왜 알베르가 내 옆에 있지? 왜 우리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걸까…. 살아 있는 것 마냥.
.......... 제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내겠습니다. ㅡ
....
나는 알베르라는 자가 무엇인지, 어떤 환영을 그는 본 것인지에 대해 이 뒤로도 많은 분석을 해보고 자신을 그들이라 자칭한 자들에게 그 이름에 관해 물었다. 모두 그럴싸한 답을 내지 못했다.
나는 그 이름이 이 괴담의 빈칸을 메울 중요한 실마리라고 생각한다.
....
[알베르 크로스만. 그는 수도를 노린 하얀 별에게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
가십 기자로 생애를 보냈던 애덤 디뮈어는 제 책을 쥐고 찾아온 앳된 얼굴의 청년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동안 그 책은 대중에게 잠깐의 흥미를 일으켜 상당히 많은 권수가 팔린 것으로 기억하지만 그를 가지고 제게 찾아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저 한때의 오싹한 관심으로 잊히고 사라지는 것인가.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입이 썼던 애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왔기에 찾아온 청년은 특별했다. 아니, 청년보다 약간 더 앳된 인상이었다. 그 얼굴은 열여덟에 가까웠으며, 검은 머리칼을 하고 있었다.
"다른 정보는 없습니까."
무뚝뚝한 어조로 내뱉은 말은 그런 말이었다. 애덤은 헛웃음을 지었다. 소년의 다리 아래 검은 고양이가 날카롭게 울었다.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것일까. 입에 물은 꽁초가 타들어 가 그는 펜을 한창 쥐어 굳은살이 박힌 투박한 손으로 재떨이에 그것을 문질러 껐다. 한동안 다른 상대와 말을 나누지 않아 목이 텁텁해 양해를 구하고 기침 뒤에 말을 이어야 했다.
"관심 있나?"
앞머리가 길었기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소년의 다리에 애교 있게 들러 붙어오는 검은 고양이의 모양새가 귀여웠다. 소년도 그리 느꼈는지 몸을 숙여 고양이를 그대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애덤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눈이 제대로 마주친 순간이었다.
"기록을 해보려고 합니다."
덤덤하게 외는 목소리는 애덤의 목에 느리게 닿아 식은땀을 배게 했다. 그 날은 여름이었으나 비가 많이 내려 더운 날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애덤은 땀을 뚝뚝 흘렸다. 그것이 턱 끝까지 맺혀 떨어질 정도였다. 소년은 그를 눈치 챈 듯 보았지만, 그에 대해 굳이 대꾸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무엇이 알고 싶지?"
"기록상 열세 번째 케일 헤니투스를 만났다고 쓰여 있는데."
목울대가 넘어가는 소리가 그렇게도 컸던가. 낡은 연립 주택에는 소년과 고양이, 그리고 애덤 디뮈어 셋뿐이었다. 소년이 책을 넘기는 순간 하나하나마저, 애덤은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어떠한 이야기도 적혀있지 않더군요."
책의 한 부근이 애덤의 눈앞에 들이밀어 졌다.
"무슨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굳은살 박힌 손. 그것이 이번에는 담배가 아닌 본인의 책을 쥐었다. 참 오래되고 익숙한 감각이었다. 애덤은 인위적으로 비워둔 제 책의 빈 페이지를 쓸었다. 그 날을 떠올리기는 쉬웠다. 참으로 강렬한 감각이었으니.
"그 날, 나는 질문 하나밖에 하지 못했어."
마찬가지로 비 오는 날, 머리를 말리고 있는 이십 대 초반의 청년. 차갑고 싸한 물비린내의 향.
그리고 암갈색 눈.
"어째서 케일 헤니투스를 자처합니까?"
소년은 암갈색 눈을 하고 눈을 휘어 웃었다.
누군가가 보면 사기꾼이라고 비유하기 좋은 그런 미소였다.
그 질문의 답은 ㅡ,
"그것이 돌아올 자들에 대한 지표가 될 테니까."
애덤은 급하게 숨을 들이켠 대가로 심한 딸꾹질을 시작했다. 딸꾹, 딸꾹. 진정하려고 가슴팍을 두드리는 그를 소년은 느리게 내려다보고 이내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뒤로 돌았다. 그 표정은 덤덤했지만, 그 눈은 사랑하는 것을 매만지듯 부드러웠다. 냐앙. 고양이가 기분 좋게 울었다.
"자, 잠ㄲ, 잠깐..!"
불규칙한 딸꾹질로 인해 애덤의 말이 짧은 어구임에도 심하게 끊겼다.
"답변 감사합니다."
"ㄴ, 너..! 너....! 당, 신....!"
손이 더듬대며 협탁 위의 머그잔을 찾았다. 급하게 허겁지겁 물을 들이켜자 이미 소년은 계단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우당탕, 급한 발걸음이 소년을 쫓았다. 소년이 걸어오고 다시 나가는 길은 물에 흠뻑 젖어있었다. 애초에 젖어있는 상태에서 이곳을 들어온 것인가. 애덤의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순간 발이 멈추었다. 더 다가가기를 경계하는 몸의 경고였다. 뒷걸음질하자 나무계단의 소리가 끼익 울렸다.
끼기익. 그 효과음이 적절할 것이다.
소년은 애덤 디뮈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애덤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본능적으로, 호기심의 충동이 목구멍에서 끌어올린 질문이었다.
"당신…. 이름이, 뭐지?"
그리고 소년은, 활짝 웃었다.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다. 거세진 비가 번개를 불러온 듯 번쩍. 소년의 얼굴 위로 지나쳐갔다.
또렷하게, 분명하게 들리는 물에 젖은 웃음소리는.
"당신이 그렇게 찾던 알베르 크로스만이 바로 옆에 있네!"
소름 끼쳤다.
추천곡: 김현식 – 비처럼 음악처럼
__________ fin.
왕세자에돌은인간
@kingisgodking
[ 케일 헤니투스와 기묘한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