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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언어들이 스쳐 지나간다. 불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영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반,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반. 내용은 짐작하지 못해도 억양과 표정으로 들뜬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비릿한 바다의 향이 섞여 불어오는 바람. 태양이 내려 앉은듯 보석가루를 뿌려놓은듯한 물빛 바다 위의 윤슬.

케일은 갑판에 나와 배가 지나온 길을 응시한다. 와인색을 닮은 붉은 머리칼이 불어오는 바람에 사방으로 흩날렸다.

여기는 물의 도시, 베네치아다.

 

 

***

 

 

말이 통하지 않는다. 외국어라곤 대충 알아듣고 번역기를 돌리는 것이 고작이다. 계산을 하기 위해 카운터로 가서 손짓 발짓을 해봤지만 점원이 알아듣질 못한다. 계획도 목적도 없이 비행기 티켓만 달랑 들고 떠난 대가를 치르는 셈일까 싶다. 하다못해 영어도 잘 못하면서 어디서 용기가 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하는 수 없이 케일이 계산을 포기하고 되돌아 나가기 위해 몸을 돌리려는 순간 뒤통수에 유창한 영어가 날아와 꽂혔다.

 

"You need some help?(좀 도와줄까?)"

케일은 머리를 뒤적여 대충 말이 되는 짧은 영어로 대답했다.

"Yes. I need. (네. 필요해요.)"

첫 만남이었다.

 

***

 

케일은 막 계산을 마친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햄과 계란과 감자 샐러드가 들어있는 것이 전부이지만 기름진 음식보단느 훨씬 입에 맞았다. 배가 고팠기 때문에 음식을 먹고 있는 곳이 길 위라는 것은 신경쓰지 않기로 한다.

 

"Is it that good?(그렇게 맛있어요?)"

"I'm hungry. (배고파요.)"

"That's not good( 그거 맛없어.)"

 

케일은 그 말에 샌드위치를 향하던 눈을 옆으로 돌렸다. 계산을 도와준 금색 머리 남자와 사이좋게 같이 걷고 있는건 신경 안 썼지만 자꾸 말을 걸어오는건 귀찮았던 탓이다.

 

"Are you free?(당신 한가해요?)"

"I'm enjoying my trip.(여행을 즐기고 있지.)"

"Unemployed?(실직자?)"

"I hope so. (그랬으면 좋겠네.)"

 

따라오고 있는 것까지는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 인간 말이 많다. 케일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아래 위로 훑었다. 남자는 한숨 가득한 얼굴로 케일에게 해명한다.

 

"What i mean is i'm not a bad person.(내 말은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란 얘기야.)"

"......"

"Don't you need a companion?(동행이 필요하진 않나?)"

"......"

"It would be dangerous to go around alone. (혼자 다니면 위험할 것 같은데.)"

"......"

"Is there a place to stay? (묵을 곳은 있나?)"

"......"

"Are you not good at English?(영어를 잘 못하는건가?)"

"아. 뭐라는거야."

 

케일이 짜증스레 말을 뱉는 것과 동시에 아는 언어가 들려온다.

 

"뭐야. 우리 말 할 줄 알잖아?"

 

 

 

***

 

"당신이 뭐하는 사람인줄 알고 믿습니까?"

"타국에서 외국인을 믿는것보다는 같은 나라 사람이 낫지 않나?"

"그거야 상대가 수상쩍은 사람은 아니었을 때 얘기고요."

"나만큼 선량한 사람이 어딨다고."

"저는 당신 이름도 모릅니다."

"알베르네. 자네는?"

 

"자네는은 또 뭡니까. 할아버지예요?"

 

"눈이 멀었나? 이 얼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으."

 

"이름 안 알려줄건가?"

 

"케일이요."

 

"그래. 케일."

 

케일은 떨이를 하는 상품마냥 대충 대답했다.

 

***

 

"가고 싶은 곳은 있나?"

 

"아뇨."

 

"여기는?"

 

"별 관심없습니다."

 

"여행 온 사람 맞나?"

 

"한가롭게 놀러다니려고 온 거 아닙니다."

 

"일하러 온 건 아니잖아."

 

한쪽이 슬며시 올라가는 케일의 눈썹을 보고 알베르는 자신의 생각을 확신한다.

 

"기본적인 영어도 못하는 사람이 일 하러 왔을리는 없잖나."

 

"....예리하시네요."

 

알베르는 어깨만 으쓱했다.

 

"이왕 놀러왔으면 제대로 즐기다 가자고. 가고 싶은 곳을 찾아보는건 어떤가?"

 

케일은 가게의 간판을 올려다봤다. '카페 플로리안(Caffe Florian)' 이라는 이름의 카페였다. 칠이 벗겨진 외관의 회색 벽면과 녹이 슨듯 고딕으로 보이는 글자가 새겨진 간판의 주변이 지저분하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카페 내부는 넓찍하다. 여행 카탈로그에서 보았던 우피치 박물관의 내부가 생각나는 긴 복도는 갈색 다이아몬드 모양의 타일이 무늬처럼 자아져있었고 양쪽으로 테이블이 차례로 놓아져 있었다. 문은 금색과 갈색 나무색이 조화를 이룬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귀족의 응접실과 같이 장식된 독립된 공간도 보였다. 벌집 모양의 금테와 유화가 그려진 천장. 점원들은 귀족의 시종들을 흉내낸 것인지 정장 차림이다.

 

"감상은 끝났나?"

 

"대충은요."

 

"여기,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야."

 

알베르가 안내 받은 테이블 위에 지도를 펼친다. 케일은 언제적 아날로그 방식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다가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러고 보니까 언제부터 이 인간과 동행하게 됐지?

 

"가이드 해주게요?"

 

"뭐 비슷해. 여기 역사책에도 나오는 유명한 사람들이 단골이었거든. 괴테, 루소, 카사노바... 등등 들어는 봤지?"

 

"들어는 봤는데, 우리가 일행이었던가요?"

 

"아닌가?"

 

케일이 고개를 훽 돌렸다. 알베르는 어느새 능청스럽게 메뉴를 고르고 있었다.

 

"제정신입니까?"

 

"죽을 상하고 있는 사람보다는 유익할테니까. 믿어봐."

 

"허."

 

"아름다운 수상도시에 왔으면 여행은 제대로 즐겨야 하지 않겠어?"

 

***

 

 

 

케일은 머리 위에 떠 있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평화롭게 흘러가는 구름과 청명하게 맑은 푸른색 하늘. 햇빛이 내리쬐는 지극히 여유로운 도시의 분위기를 만끽하다가 고개를 떨군다.

 

"베니스에 왔으면 산 마르코 광장은 봐야지."

 

"......"

 

"베니스의 심장이거든."

 

능청스러운 알베르의 말에 케일이 고개를 돌렸다. 밤에 물 그림자로만 마주친 산 마르코 광장은 환상 그 자체였다. 중앙이 뻥 뚫린 거대한 광장을 두고 눈이 뱅글뱅글 사방으로 돌아간다.

 

산 마르코 광장은 베니스를 대표하는 명소이다. 케일은 디귿자 모양으로 둘러싸인 광장의 형태를 나른한 눈으로 훑었다.

 

삐죽하게 솟은 첨탑같은 기둥들과 종탑. 입구의 기둥 위에는 베니스의 상징물인 날개 달린 사장상과 성조지상이 나란히 서 있다. 멀지 않은 곳에 지붕이 둥근 산 마르코 성당과 두칼레 궁이 잘 보인다. 비잔틴과 오리엔트가 섞인 독특한 양식의 건물들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서 있다. 달뜬 표정으로 분주하게 걸어다니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안쪽으로 걸었다. 오래된 명화의 속을 들여다보는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막혀 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어 오래도록 시선이 머물었다.

 

"와보길 잘했지?"

 

케일은 알아채지 못할정도로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풀샷을 찍는 관광객들과 호객을 하는 장사꾼들의 목소리들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록수야 여행갈거면 베니스는 가줘야하지 않겠냐? 곤돌라가 운하 사이를 지나다니는 광경이 그렇게 장관이라더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알베르가 어깨를 툭 두드리는 소리에 먼 곳을 보던 눈이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냥, 곤돌라를 타봐야겠다 싶어서요."

 

 

 

***

 

크기가 다른 배들이 선착장에 늘어서 있다. 촘촘히 붙은 긴 나무판들을 위를 몇 개의 기둥으로 떠받치고 있는 부두가 활기로 가득하다. 뭐라 설명하는 가이드들과 바포레토에 탑승하는 손님들의 목소리와 바다가 출렁이는 소리, 간간히 새 소리도 들려온다. 늘어선 배 들을 제 몸 위에 얹은 에메랄드빛 파도가 노래하듯이 흔들거렸다. 양쪽 벽면으로 붙은 건물 중앙으로 난 물길 위로 몇몇 배들이 손님을 태우고 지나간다.

 

소금기가 가득할 것이 분명한 바닷물의 바닥은 어떨지 문득 궁금해진 케일은 물 아래에 손을 집어넣어볼까 고민했지만 쪼그려 앉은 다리가 아팠다. 케일은 허벅지를 두드리며 몸을 일으켰다. 등 뒤에 인기척이 있다.

 

"두칼레 궁은 볼 생각없나?"

 

"별로요."

 

"한번쯤 보는것도 나쁘진 않은데. 베니스에 왔다면 봐야할 곳 중 하나거든."

 

두칼레 궁전은 9세기 건축된 베니스를 대표하는 고딕양식 건축물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총독관저였던 동시에 감옥이었던 탓에 베니치아의 권력과 영광의 상징인 이 건물은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유화 작품인 틴토레토의 벽화 '천국'과 레노네세의 '베네치아의 찬미' 라는 그림은 베니스에 왔다면 꼭 보아야할 작품으로 손 꼽히는 것이니, 알베르의 말이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같이 가자는 말을 길게 하는 재주가 있으네요."

 

대부분은 그 말에 공감을 할 것인데, 케일은 한 문장으로 거절을 말한다. 알베르가 정곡을 찔린듯 두 눈을 깜빡이다 곧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말이 맞아. 싫다는 사람에게 강요를 할 수는 없고, 이쯤에서 갈라져야겠군. "

 

"동행 구한적도 없습니다. 순 제멋대로 왔다가 가시네요."

 

케일은 잔뜩 인상을 쓴 얼굴로 휘휘 팔을 내저었다. 얼른 네 갈길 가라는 뜻이다. 알베르는 씨익 웃었다.

 

"뭐 낯선 여행지에서도 인연은 이어지는 법이니까. 내가 볼땐 우리 또 만날 것 같거든."

 

"그럴 일 없습니다. 곤돌라는 어디서 타는지나 알려주시면 감사할 것 같네요."

 

"곤돌라 승착장은 산 마르코 광장 뒤편에 있어."

 

대답과 함께 명함 한 장을 내민다. 눈 앞에서 팔랑거리는 종이를 케일이 무시했다. 그랬더니 어느새 손바닥 위에 올라온 직사각형 명함 위로 가는 케일의 손가락이 하나씩 접혀간다. 반강제로 명함을 쥐어들게 된 케일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부적도 아니고, 고작 명함 한장인데 참 애쓰시네요."

 

"내가 감이 좋은 편이거든."

 

암갈색 눈동자가 강제로 손에 넣게 된 명함을 향한다.

 

'알베르 크로스만' 이름.

 

+82 - xxxx...... 연락처.

 

단 두줄만 있는 명함이다. 낯선 사람에게 이런걸 알려줘도 되나.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알베르가 저만치 멀어져 있다. 버릴까 하다가 외투 주머니에 명함을 던져 넣었다. 등을 돌려 걷다가 문득 다른 것을 깨닫는다. 자연스럽게 손을 잡는 알베르를 뿌리치지 못했다는것과 그게 썩 기분이 나쁘진 않았음을.

 

 

 

***

 

에메랄드빛 바다 위에 위치한 아름다운 물의 도시.

 

도시 곳곳으로 이어지는 좁은 물길을 헤치며 유영하는 곤돌라와 칸초네를 부르는 곤돌리에.

 

베니스 하면 떠오르는 로망같은 것이지만 정작 케일에겐 별 다를 것도 없는 것이다. 세계적인 명소를 마다하고 30분 남짓동안 작은 배에 몸을 싣을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의문은 다물린 입술 사이로 삼켜진다.

 

곤돌라가  작은 운하들 사이를 느린 속도로 미끄러져 지난다. 멍하니 지나온 길을 눈으로 훑던 케일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탄식의 다리'

 

두칼레궁과 죄수들을 수감하는 감옥 사이의 운하를 잇는 다리다. 수감된 죄수들이 다시는 베니스를 보지 못하는 생각에 탄식한다해서 탄식의 다리던가.

 

어렴풋이 들었던 정보를 끼워 맞춰본다. 겉보기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어느새 곤돌라는 베니스의 궁들과 작은 다리로 이어진 길을 빠져나온다. 트인 바다가 반갑게 손짓하는 기분이 든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소란스럽다.

 

베니시의 본섬을 관통하는 큰 운하를 지나니 아드리아 해에 석양이 잠겨 빨갛게 물들기 시작한다. 케일은 한순간 숨을 멈춘다. 바다가 해를 완전히 삼켜지기전 짧은 순간동안 볼 수 있는 장관이다.

 

바다의 윤슬 위로 크고 작은 불꽃들이 단말마를 내지르듯 하나둘씩 떠오르고 바람에 흔들리며 여운을 만들기를 반복한다.

 

바다가 타오르는것 같다고. 케일은 잠시 감성적인 여운에 잠긴다.

 

 

 

***

 

혹자는 말한다. 베니스에서 좁고 복잡하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헤매보는 것도 특별한 묘미라고.

 

석호 위에 건설된 이 작은 수상도시는 중세도시의 모습의 일부 가지고 있는 탓에 미로 같은 길로도 유명하다. 그러니 현지인들도 종종 길을 잃곤 하는 이 곳에서 대책 없이 찾아온 여행객이 길을 잃어버리는것도 무리는 아니다.

 

맹세컨데 여행 계획은 없었지만 제 한몸 소중하지 않은건 아니었다.  유난히 큰 눈을 깜빡이며 구걸하는 아이에게 푼 돈 몇 푼을 고사리 같은 손에 쥐어주는 틈에 소매치기를 당할 생각도, 그 반동으로 리알토 다리에서 구를 예정도 없었다는 말이다.

 

무릎이 까진 것 같다. 멍도 들었을 것 같다. 옷으로 가려진 안쪽 피부가 욱신거렸다 하루종일 걸어 다닌 탓인지 두 다리가 이렇게 힘 없을 줄도 몰랐다.

 

케일은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외투와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핸드폰은 있다.

 

희망을 가지고 찾아보지만 지갑은 없다.

 

그 사이 해가 완전히 넘어가버린 밤의 거리는 앞이 보이지 않을정도로 어둡다. 비행기 티켓은 숙소에 있으니 괜찮겠지. 다만 숙소가 어느 방향인지가 가물가물하다. 손짓, 발짓이라도 해서 물어볼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유럽은 밤에 사람이 안 돌아다닌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야 할텐데 오늘밤은 꼼짝없이 노숙을 해야 하나. 한숨 가득한 생각이 머릿속을 채워갈때쯤 손가락에 무언가가 걸렸다.

 

'알베르 크로스만.'

 

'내가 볼땐 우리 또 만날 것 같거든.'

 

케일은 망설임없이 손가락으로 번호를 찍었다. 기막힌 우연인지, 인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써먹으라고 준 것이니 염치는 없어도 되겠지. 동앗줄을 쥐는 심정으로 수화음이 이어지는것을 기다린다.

 

"여보세요."

 

잠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다. 벨소리에 잠에서 깨어난것 같았다. 잠이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가 여보세요. 하고 몇번 같은 단어를 반복하는동안 케일은 몇번 입을 여닫기를 반복하다가 대답했다.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데요. 지갑도 잃어버렸고요. 숙소가 어딘지 기억이 안납니다."

 

"......"

 

"......"

 

"케일?"

 

"네."

 

"......"

 

"......"

 

"돌겠네...."

 

"거기 어딘데?"

 

"아까 당신이랑 같이 왔던 곳이요."

 

 

 

***

 

'산 마르코 광장.'

 

케일이 기억하는 곳이 그곳 밖에는 없었다. 넌지시 말을 던지고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가늠을 해보려고 할 때쯤 알베르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앞에 서 있었다.

 

"이게 무슨 꼴이야."

 

"보다시피 "

 

케일은 양쪽 팔을 크게 벌리곤 힘없이 웃었다. 알베르는 상황을 가늠해 보기 위해 케일을 살폈다. 살피려고 했다.거리가 어둡다. 하는 수 없이 얼굴을 가까이 기울인다. 한뼘 거리를 두곤 애써 담담한척하는 얼굴과 상처가 난 손과 다리, 무릎, 어깨 등에 눈을 눌려붙였다가 다시 상기된 얼굴을 들여다봤다. 알베르의 표정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화를 눌러 참는듯한 표정이다.

 

“이게 다 무슨 꼴인데. 이 꼴로 돌아다닌건가? 계속? ”

 

"아뇨. 지갑은 좀 전에 소매치기를 당했는데 그 바람에 다리에서 굴러버려서 "

 

말이 없어서 의중을 가늠하기 어렵다. 케일은 상황을 설명할 말을 몇 가지 더 꺼냈다.

 

"숙소 찾아가는것만 도와줘요. 짐 찾으면 사례할게요."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나?"

 

"음..."

 

"미안합니다. 신세지겠습니다?"

 

"그거보다 먼저 해야할 거."

 

"감사합니다....?"

 

탄식같은 긴 한숨이 이어진다.표정을 보니 그것도 아닌가보다.

 

"대책이 없다고 해야할지, 용감하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네."

 

"둘 다인셈 쳐요."

 

"나를 부려먹는 사람도 네가 유일할거야."

 

"그런가요."

 

알베르가 뒤를 돌아 천천히 몸을 숙였다. 케일은 눈을 깜빡였다.

 

“업혀.”

“됐습니다.”

“제대로 못 걷는 것 같은데 해줄때 얼른. 요금은 비싸게 받아먹을거니까.”

“그거 참 안심이네요.”

 

단순한 호의보다는 이 편이 훨씬 대하기 편하다. 케일은 냉큼 팔을 목에 두르고 무게를 싣었다. 알베르의 손이 엉덩이를 받쳤다가 두 다리가 제 허리 근처로 고정되도록 자리를 잡았다. 자세를 안정적으로 잡기 위해 몸이 몇번 알베르를 따라 흔들렸다.

 

몸이 크게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알베르가 걸음을 뗐다.

 

"내가 연락처 안 쥐어줬으면 어떡할 뻔했어?"

 

"이런 일이 일어날줄 알았던 사람처럼 말하네요."

 

허리 아래를 감싼 다리가 흔들린다. 케일은 넓은 등에 늘어지듯이 기댔다. 알베르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업혀 있는 몸에 열이 오른 것이 느껴진 탓이다.

 

"딱 털어먹기 좋아요. 머리에 써붙이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반응할걸."

 

"......"

 

"케일, 자나?"

 

"아니요...."

 

케일은 무게가 실리는 눈꺼풀을 들어올리려고 애썼다. 장기간 보행에 익숙하지 않은 다리와 발은 부었고 넘어져 굴러서 상처투성이다. 몸은 안 아픈 곳이 없고 지나치게 피곤했다.

 

일진 사납네.

 

긴 인생은 아니었지만 팔자가 사납지 않은 날은 드물었으니, 오늘은 좀 과했던 것이라고 생각 해볼까.

 

붉은 머리칼을 등 위로 문지르면서 케일은 꺼져가는 정신을 부여잡기 위해 애썼다. 자장가를 부르듯이 규칙적으로 들리는 발소리가 걱정스레 등을 토닥이는 손바닥의 울림과 겹쳐진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의 등에 업혀가고 있다는 것이 까맣게 잊혀질정도로 다정한 울림이다. 긴장이 풀려 입술을 빠져나온 긴 숨이 베니스의 밤 공기와 섞여 짙은 여운을 남기며 사라진다.

 

까만 점처럼 보이는 거리와 달리 밤바다는 주홍색의 불빛이 이지러져 동화 속 한 장면처럼 펼쳐진다.

 

케일은 완전히 눈꺼풀을 닫았다.

 

베니스에서 처음 맞는 밤이었다.

 

 

2.

 

"일어났나?"

 

케일은 가물가물한 정신을 붙잡으려고 애썼다.

 

"아침입니까?"

 

"아직은 아니야."

 

뜨거운 물수건이 피부에 닿자 케일이 짧은 신음을 질렀다.

 

"언제 일어날지 몰라서 말이야. 그 꼴로 바로 잠들 수는 없지 않나."

 

완전히 뜨인 눈에 가운만 걸친 차림인 알베르가 들어왔다가 사라진다. 뺨에서 시작해 턱선을 지난 수건이 눈가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따뜻한 온기가 아쉬운 여운을 남기고 사라진다.

 

숨소리가 들린다. 제 것인지 아니면 코 앞 거리에 있는 알베르의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몸을 물리기 위해 손을 바닥에 짚자 시트가 손자국을 따라 눌린다. 닿는 것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침대 위다. 전신 거울처럼 나 있는 창으로 나이트뷰가 잘 보인다. 한눈에 보기에도 넓은 방 안은 1인실인지 아닌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딥니까."

 

"호텔."

 

"......"

 

"내가 묵고 있는 곳."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볼에 눌러붙은 머리칼을 살살 문질러 떼어낸다. 누군가 시중을 들어본 적은 없는 사람같은데 손길이 제법 섬세했다. 조금 뜨거운 감이 있었던 수건은 딱 따뜻할정도로 식어 있었다. 수건의 부드러운 촉감이 목덜미로 미끄러지는 감각에 케일은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맨살에 방 공기가 느껴졌던것이다.

 

도르륵 눈동자만 굴려서 제 차림을 살폈다. 입고 있던 옷들은 어딘가로 치워져 있고 알베르와 마찬가지로 흰 가운 차림이다. 케일은 천천히 시선을 끌어올려 알베르와 눈을 마주쳤다. 설명하라는 눈빛을 본 알베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 입고 자려고? 미리 말하면 옷만 갈아입혔네."

 

"별로 달갑진 않네요."

 

케일이 팔다리를 움직이며 말했다.

 

"어쩔 수 없었어. 그보다 다리 좀 내밀어봐. "

 

위에 있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 있다. 까진 무릎 주변을 수건이 살살 지나간다. 따끔거렸다. 케일은 인상을 썼다. 종아리와 발목을 지나 발등 위로 올라온 손이 발의 움푹한 부분을 꾹 누르고 복사뼈를 따라 발 뒤꿈치를 주무르다가 떨어졌다.

 

"능숙하네요."

 

"뭐, 그렇지."

 

케일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지나치게 친절한것 같기도 하고요."

 

와인을 닮은 붉은 머리칼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린다. 들어올린 알베르의 얼굴 위로도 몇가닥이 떨어졌다. 붉은 장막 안에 갇힌 기분이 든 알베르가 한쪽 눈썹을 밀어올렸다. 묘하게 눈이 누근하다. 알베르는 이마에 손을 댔다. 창백할만치 희던 피부가 체온이 돌아 불그스럽게 물들어 있다. 열이 나는지 확인한 손이 조심스럽게 떨어진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지만, 너한테 뭘 바라는건 없어."

 

"믿어도 될 소립니까."

 

"호의라고 생각하기엔 지나치게 친절하고, 지나치게 다정한데."

 

암갈색 눈동자가 쏘아지듯이 푸른 눈동자를 응시한다. 목소리가 다소 격양 되어 있다. 알베르가 수건을 내려놓은 손으로 침대 시트를 짚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시선의 위치가 다시 바뀐다. 케일이 눈을 위로 치켜떴다. 화가 났나. 달라진 분위기에 솜털이 바짝 섰다.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

 

"내가 무슨 의도로 널 여기에 데려왔는지?"

 

얼굴이 겹쳐질듯 가까웠다. 눈 앞에서 열고 닫히는 입술의 움직임에 눈이 집중된다. 알베르가 초승달처럼 눈을 휘어뜨린다.

 

"가령, 이런 걸 바랐다고?"

 

알베르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습한 호흡이 바싹 마른 입술 위로 눌러붙는다. 눈꺼풀이 움직이고, 눈동자가 구르고, 목 울대가 밀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 솜털이 부딪히고 체온이 느껴질정도로 가깝지만 피부는 조금도 닿지 않는 딱 그 정도의 거리.

 

케일이 느리게 숨을 몰아쉬었다. 미묘하게 다른 온도로 숨이 얽히는 감각이 어색하다. 여전히 고개를 거두지 않은 상태로 알베르가 웃음을 목 안으로 삼켜넣었다.

 

"내가 그런 종류의 사랑을 할거라고 생각하나?"

 

키스 대신 단어 하나, 하나가 더운 숨을 타고 달라붙었다. 당했네. 여유롭던 표정이 허물어졌다. 케일은 짜증 가득한 표정을 숨기지 않은채 알베르의 어깨를 밀었다.

 

"고약하네요."

 

"확실한거라고 해두지."

 

몸을 일으켜 나간 알베르가 잠시 뒤 구급상자를 가져와 소독약과 밴드를 꺼냈다. 적신 솜으로 상처 부위를 두드리기 시작한 알베르를 보며 케일이 퉁명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냥 냅두면 나아요.”

“그냥 냅두면 덧나.”

 

정성스럽게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정체 모를 남자가 알다가도 모르겠다. 처음 만났을때부터 느꼈지만 사고방식은 저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비슷한 부류의 인간이니 말이 통했을텐데 지금의 그의 행동은 케일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넘어가 있었다. 기묘한 짜증이 일었던 케일이 고개를 훽 돌렸다.

 

"다 끝났어."

 

"네."

 

"씻을건가?"

 

"......"

 

"일어났으니 샤워, 해도 될 것 같은데."

 

케일은 느긋이 몸을 일으켰다.

 

"네, 그게 좋겠네요."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대충 수건을 문질러 머리에 물기를 털어내고 몸의 물기는 닦는 대신 가운을 걸쳤다. 내버려두면 곧 마를텐데 굳이 닦기는 귀찮았다.

 

"당신은 안 씻습니까?"

 

"씻고 나왔어. 다만 기분이 묘해져서 말이야. "

 

케일과 다르게 알베르의 머리칼은 물기 없이 말라 있다. 눈 떴을때 봤던 가운 차림으로 침대에 걸터 앉은 알베르와 막 샤워를 마친 케일. 방 안에 있는건 단 둘뿐.

 

아.

 

막 깨닳았다는듯이 침음을 흘렀다. 곧 케일은나른하고 고혹적인 웃음을 지었다.

 

"아까 물었죠. 당신 지나치게 다정하다고."

 

"......"

 

"날 보고 아무 생각이 안든다고?"

 

"무슨 생각이든 하길 바라는 것 같다고 느껴지는데."

 

"생각하기 나름 아니겠어요?"

 

"바로 잘건가?"

 

"나가서 좀 걷죠. 유럽 3대 야경은 아니지만 베니스도 봐줄만 하다고 들었거든요."

 

***

 

 

 

유럽의 3대 야경이라고 한다면 프랑스 파리와 체코의 프라하, 헝가리의 부다페스트가 손에 꼽힌다. 에펠탑에서 내려다보는 파리의 밤과 카를교에서 올려다보는 프라하성의 풍경, 어부의 요새에서 보이는 강 건너의 모습을 본다면 그 말에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르면 유명한 곳을 가라고. 야경을 보고 싶었으면 저 세 도시를 갔겠지만 어렴풋한 계획이라도 짤 수 있었으면 무작정 베니스행 티켓과 간단한 짐을 들고 비행기에 오르진 않았겠지.

 

아까 곤돌라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문득 물에 비친 도시의 야경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도시를 지나는 바닷바람에 온갖 생각이 씻겨나가는 기분이 들었던 탓에, 심연을 눌러놓은듯 깊이를 알 수없이 까만 바다에 복잡한 것들을 다 털어고선 훌훌 가벼워지고 싶었다.

 

호텔은 바닷가를 끼고 건축되어 있다. 창으로 보이는 바다가 하나의 묘미인 곳이다. 로비를 빠져나오고 나서는 두 사람은 말 없이 걸었다. 대화도 없는 산책인데도 이상하게 어색하지 않았다.

 

베니스는 도시가 크지 않아 섬과 섬을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면 도보로도 충분히 여행은 가능하다. 가로등 불이 켜진 좁은 인도를 걸어 산 마르코 광장을 빠져 나온다.

 

"다시 가볼래?"

 

"어디요."

 

"리알토 다리. 처음 오는 여행인데 나쁜 기억은 좋은 기억으로 덮어야하지 않겠어?"

 

"......"

 

케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알토 다리에서 아카데미아 다리까지가 바포레토 노선이 야경을 보기엔 좋지. 아카데미아 다리도 좋고."

 

 

 

리알토 다리는 베니스의 대운하 한 가운데에 세워져 있다. 대운하 사이에는 세 개의 다리가 놓여져 있지만, 그 중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대치형의 아치교는 베니스를 대표하는 다리로 꼽힌다. 밀집한 상권의 중심지이기도 하기에 베니스에 왔으면 한번쯤은 가봐야할 명소인것이다.

 

산 마르코 광장에서 리알토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다. 리알토 다리에서 도착해서 알베르는 바포레토 노선을 찾았고 케일은 주변을 둘러봤다.

 

"1번 바포레토를 타면 아카데미아 다리로 건너갈 수 있어. 10분 뒤에 한 대가 오는데 어떡할래?"

 

"곧 바로 가죠."

 

"그러지."

 

바포레토를 타는 것은 두 번째다. 첫번째는 공항을 나와서 아무거나 잡아탈때 탔었다.  케일은 이번에는 밖으로 나오지 않고 안쪽으로 냉큼 들어가 창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추운건 딱 질색이었다. 그 옆자리를 알베르가 차지하고 앉는다. 케일은 눈동자만 굴려 알베르가 옆으로 다가오는것을 봤고 곧 창으로 눈으로 돌렸다.

 

빛의 화가라고 불리는 램브란트. 그의 작품에선 짙게 드리운 어둠에서 은은하게 배어나오는 빛을 느낄 수 있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그의 그림을 떠올렸다. 이보다 더한 표현을 찾을 수가 없었다. 도시 곳곳에 세워져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의 불빛이 바다에 기울어져 바다 위를 수놓고 있었으니까.

 

케일은 눈을 먼곳으로 돌렸다. 살루에 성당에 불이 켜졌다. 멀리서 바라보면 오래된 명화를 보는것 같고 고개를 숙여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지러진 수채화의 느낌도 나는 곳을 눈으로 훑는다.

 

"오길 잘했지?"

 

"네."

 

저도 모르게 웃고 있다는걸 문득 깨닫는다.

 

"여기, 연인들도 많이 오거든. "

 

"아쉽겠네요. 연인이 아니라, 같이 있는게 나라서."

 

"뭐, 나쁘진 않아. 보는 재미가 있어."

 

알베르가 등 뒤에서 선선히 웃고 있었다. 바지에 손을 집어넣은채 별다를 것없다는듯이 바라보는 얼굴을 보고서야 케일은 그가 이 풍경에 익숙하다는 것을 깨닳았다.

 

"현지인이예요?"

 

"아니."

 

"그런것치고는 여길 꽤, 잘 아는것 같은데요."

 

"말했잖아. 나는 내 여행을 즐기고 있다고."

 

"곤란하겠네요. 내가 당신 여행에 끼어들어서."

 

케일이 바다를 들여다보던 눈을 들어올렸다. 뒤로 돌았다. 가로등을 등진탓에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여긴 일출 장소로도 유명해. 보고 갈건가?"

 

케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말을 돌린다. 고작 하루를 보았는데도 케일은 알베르가 곤란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알베르가 말을 바꿨다.

 

"아니면 지금 돌아가야 할 거야."

 

케일은 크게 호흡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길게 숨을 내뱉는다. 고작, 고작 하루남짓한 시간을 보았을 뿐인데 그에게 휩쓸리고 있었다. 알고 있는 것은 고작 얼굴과 이름. 바꾸면 그만인 연락처, 잠시 머물뿐인 숙소.

 

그만 해야한다. 더 휘둘리기 전에 발을 돌려야 했다. 케일은 알베르와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내 숙소를 찾는 것까지만 도와주면, 그것까지 끝나면 당신은 당신 갈 길을, 나는 내 갈길을 가요."

 

밤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지른다.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흐트러지는 잠시 동안의 침묵이 무거웠다. 알베르가 한 걸음 앞으로 걸었다. 가로등을 등져 보이지 않던 표정이 드러난다. 꿈을 꾸는 것 같다. 찡그린 인상은 비장함마저 묻어난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건 곤란해."

 

"왜."

 

"네가 신경쓰이니까."

 

"......"

 

"신경쓰이고, 걱정되고, 불안하니까."

 

"마치 물가에 내놓은 애 보는것처럼 구네요. 내가 애도 아니고."

 

"뭐, 비슷해."

 

" '보호자'역할을 자처하는건 고작 그런 이유 때문인가요?"

 

또 입을 다문다.

 

"미안하지만, 보호자는 더 필요없거든요."

 

거리가 가까워진다. 케일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마가 부딪혔다. 의기양양한 웃음이 번진다.

 

"아무것도 바라는게 없다더니, "

 

핀잔처럼 나온 말이 토막났다. 사이에 둔 거리감이 허물어졌다. 귀끝을 매만지는 긴 손가락이 양뺨을 감쌌다.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진다. 짧게 입술에 겹쳐졌다 떨어진 온기가 주는 여운에 케일은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지금은 다르지."

 

알베르가 선선히 웃었다. 그게 대답이라는걸 알았다.

 

의기양양하고 자신이 넘치는 얼굴.

 

그래. 이런 표정을 보고 싶었어.

 

케일이 콧 끝에 닿았다 떨어지는 체온을 붙잡기 위해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을 줌과 동시에 또 한번, 입술이 겹쳐졌다.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다가 안쪽으로 파고 들어온다. 감춰둔 마음을 쏟아내는듯 은근하게 입안을 헤집는 뻔뻔한 침입자의 작태에 기가찼다. 이러고서 아무 마음이 없었다고..

 

"누가 거짓말쟁이인줄 모르겠네."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지."

 

"실패했다는 소리처럼 들리는데요."

 

"으음."

 

"숙소로 돌아가요."

 

“......”

 

“야경 구경은 충분히 한 것 같은데, 얼굴을 좀 더 보고 싶기도 하고.”

 

‘사는게 최고다. 잊어버리고 살아. 한사람이 가면, 또 다른 사람이 오지 않겠냐?’

 

바람결에 들려오는 아릿한 목소리를 털어내려, 케일은 단단하게 깍지를 낀 손을 흔들며 쾌활하게 말했다.

 

알베르는 어쩐지 먹먹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조금 늦게 대답한다.

 

“그래.”

 

***

 

하나만 있는 킹 사이즈 침대를 두가 어디서 잠들지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던 건 좋았다. 몸이 전 날보다 더 피곤하다는 것만 제외하면.

 

"케일."

 

"으음..."

 

"케일, 일어나야지."

 

일어났더니 태양이 머리 꼭대기 위에 떠 있었다. 눈가를 문지르고 뺨에 붙어오는 입술에 모른척 어리광을 부리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올렸다.

 

"언제 일어났어요."

 

잠긴 목소리가 낯설어서 두 어번 마른 기침을 했다. 알베르가 걸터앉은 매트리스가 푹 꺼졌다. 케일은 목덜미를 문지르다 몸을 일으켰다. 알베르는 가벼운 가운 차림이다. 늦은 새벽에야 숙소에 들어왔으니 피곤한건 매한가지일텐데 표정은 상쾌해보인다.

 

"조금 전에."

 

케일은 이불을 들췄다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차림이라는것을 뒤늦게 깨닳았다.

 

"가운 하나만 가져다줘요."

 

"입혀줄까?"

 

케일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빙긋 웃은 알베르가 찬장에서 곱게 갠 가운 하나를 들고 왔다. 농담은 아니었는지 흰 가운에 팔이 하나씩 끼워진다. 케일은 손이 이끄는대로 팔을 들어올리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거리가 가까워진다. 어깨를  짚고 목깃 부분을 잡아 양쪽으로 교차한다. 붉은 목덜미와 투명한 피부 안쪽에 차례로 시선을 둔 알베르가 느릿하게 느껴질정도로 공들여 앞섭을 여며준다.

 

"뭡니까?"

 

"뭐긴. 아껴주는거지."

 

"저번부터 느끼는거지만 능숙하네. 나를 아주 잘 아는 것 같고."

 

"손이 많이 가는 애인이 있었거든."

 

케일은 물끄러미 손끝을 바라보던 눈을 들어올렸다. 따라 들어올려진 시선이 마주친다. 어느순간부터 이상하게 느껴지던 기시감이 이 순간에도 고개를 들이밀었다. 모른척할까, 넘어갈까 고민했다.

 

케일은 가운에서 떨어져 나가는 손을 잡아 시트 위에 얹었다. 무게를 담아 실린 힘에 매트가 푹 꺼졌다. 아프지는 않지만 상대를 구속하기엔 충분한 힘이다. 알베르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 미소를 덧그렸다.  

 

"그런걸 궁금해할 줄은 몰랐는데. 그닥 유익할 것도 없는 과거 얘기야."

 

"알베르. 내가 궁금해하는게 그게 아니라는걸, 당신은 알아."

 

가늘게 뜨여진 눈이 알베르가 입술을 굳게 다무는 광경을 목격한다.

 

"이름, 연락처. 그 외에 내가 당신에 대해서 뭘 알지? 그런데 당신은 날 아는 사람처럼 굴거든."

 

"그게 중요한가?"

 

"중요할걸. 나는 왔을 때처럼 또 가버리면 그만인 사람이잖아."

 

"그럼 내가 찾으러 갈 수 밖에 없잖아."

 

"순전히 모순덩어리뿐인 말인데."

 

"글쎄. 그다지 거짓말을 한 기억은 없어."

 

"......"

 

"분명한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 하나라는거야."

 

깔려 있던 손을 뺀 알베르가 마른 등을 어루만지다가 슬쩍 무게를 싣는다. 품으로 끌어당기려는걸 알면서 모른척 눈을 감았다.

 

"다투면서 보내기엔 함께 있는 시간이 아깝잖아."

 

"그래. 그보다 이제 내 짐을 찾으러갈 때가 된 것 같은데, 도와줄거지?"

 

알베르가 어깨를 으쓱한다. 물어볼 것도 없는 질문이라는 소리다. 케일은 창으로 비치는 베니스의 바다를 응시한다. 당연한가. 낯선 여행지에서 사랑에 빠지는 연인들의 이야기는 로망같은 거니까.

 

3.

'각자 그 나름대로 잊을 수 없지만, 로마입니다. 내가 살아있는 한, 나의 기억 중에서, 이 곳의 방문을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오드리 햅번 주연으로 유명한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공주가 가장 기억에 남는 도시를 묻는 한 기자의 말에 대답하는 장면이다.

 

공주와 기자가 로마에서 보낸 짧은 휴가와도 같은 사랑를 담은 영화 '로마의 휴일'

 

 

 

따분한 왕실생활에 싫증이 나 궁을 빠져나오는 앤 공주. 신문 기자인 조는 특종을 잡을 불순한 의도로 공주에게 접근했지만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공주를 사랑하게 된다.

 

알베르는 오래된 영화 포스터로 향하던 눈을 떼어냈다. 케일이 부르는 소리를 따라 침대에서 일어난다.

우드

@library_wood

[베니스의 연인]

***

 

식사를 마치고 로비로 내려왔을때는 정오가 훌쩍 넘어가 있었다. 알베르는 슬며시 팔짱을 끼고 휴대폰으로 몇 가지를 검색하고 체크 아웃을 했다. 이쪽도 작은 캐리어 하나정도로 짐이 단촐하다.

 

“벌써 체크아웃을 해요?”

“너랑 같이 묵게.그보다 말이 자꾸 오락가락하는데. 하나만 해.”

“음.”

 

"숙소는 어디에 잡았는데?"

 

"마르코 폴로 국제 공항 근처."

 

"이름은 기억하지?"

 

케일이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기 티켓을 편도로 끊지 않았다는게 떠올랐다. 출국 날짜가 제대로 기억이 안났다. 대충 2박 3일즈음이라고 짐작했다. 여권도, 현금도 없다.

 

하룻밤 사이에 번갯불이 콩 구워먹듯이 연인과 동행의 어디쯤 되는 사람이 생겼는데 마냥 의지할수는 없었다. 호텔 안을 가운만 입고 돌아다닐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케일은 알베르에게 일정이 있는지부터 물었다. 아쉬운 소리를 해야하는것은 제 쪽이니 그의 일정 빈 구석이 보이면 부탁을 할 생각이었다. 그랬더니 어차피 하루가 반이 날아갔는데. 오늘은 널 따라다니는걸로 하지 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

 

“언제 돌아가요?”

“네가 돌아가는 날이랑 같을걸?”

“내가 언제 돌아갈 줄 알고?”

“베니스에서 보통은 이틀을 묵지.”

 

둘러대듯 꺼낸 말이 수상쩍다.

“3일을 묵으면 어떡하려고 그랬는데요.”

“어쨌든 2박이었잖아?”

알베르는 모르는척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돌아간 방향으로 얼굴을 들이대니 반대편으로 또 고래를 훽 돌린다.

“뭐하자는건데.”

“갑작스런 대시는 심장에 좋지 않아서.”

“못 볼 꼴 다 본 사이면서 별 소리를 다 하네. 미스터 밀리언이예요?”

“그런 농담도 할줄 알아?”

“누가 베니스에 왔으면 그런 말장난은 해보라는 소리를 해서.”

“누군데?”

“그건 나도 비밀이지.”

 

Mr. Milione는 생전에 동방을 묘사할때 백만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던 마르코 폴로를 거짓말쟁이라고 조롱하던 단어다. 마르코 폴로는 베니스 출신의 상인이었고 마침 향하는 곳도 마르코 폴로 공항이었으니.

 

***

 

어렵지 않게 호텔을 찾아낼 수 있었다. 지갑에  룸 카드키며 신분증이며 중요한 것들이 다 들었기 때문에, 신원을 증명하는 과정을 거쳤고 한 사람 숙박인원을 추가했다. 그리고 새로운 카드키를 받아 방에 들어왔다.

 

“심한데.”

 

들어가자마자 알베르가 한 소리를 했다. 방 안에 덩그라니 세워져 있는 캐리어가 하나 놓여있었다. 지퍼를 열어보니 짐을 하나도 안 풀었다. 미리 준비되어있는 기본적인 물품을 제외하고는 개인적인 생활 용품도 없었다.

 

“도저히 여행 온 사람으로는 안 보여.”

“그냥 왔어요.”

 

케일은 외투를 아무렇게나 벗고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알베르는 케일 나름대로 대답을 회피하는거라는걸 눈치챘다. 외투를 걸어놓고 침대 위에 무게를 실었다. 방 안에 침대는 딱 하나 있었다. 케일은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손목이 잡혔고 허벅지가 눌렸다. 금색 머리칼이 뺨을 간질인다.

 

“자꾸 다른 생각을 하잖아.”

“......”

“정말 얘기 안해줄건가?”

 

알베르가 나른하게 웃었다. 입술이 짧은 온기를 남기고 떠나간다.

 

“뭐하는건데.”

“시위.”

“무슨 시위를 이렇게 해.”

“말해줄때까지 해보려고.”

 

방심 한 사이에 혀 끝이 입술 가르고 들이닥쳤다. 더운 숨에 솜털이 바짝 섰다. 케일은 손목을 빼내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고개를 훽 돌리니 또 따라오고, 입술이 겹쳐지고... 행위가 반복이 됐다. 뒷머리칼이라도 쥐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점점 의기양양해지는 얼굴이 얄미워서 애를 써보다가 한숨과 함께 항복 사인을 보냈다.

 

“졌다. 졌어. 울음밖에 안 남는 얘기라도 듣고 싶으면 얘기해줄게.”

 

***

 

가슴 한켠에 묻어 놓은 이야기를 꺼냈다.

 

“내 아버지 같은 분이셔.”

 

무릎을 세워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사표도 냈고, 베니스엔 가보라는 말이 떠올라서 비행기 티켓도 끊었고.

 

알베르는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무릎에 묻은 머리를 끌어당겨 제 어깨에 기대게 만들었다.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는 케일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린다. 아주 미세한 차이를 알베르는 짚어냈다.

 

“울어도 돼.”

“......”

“좀 더 슬퍼해도 돼고.”

“......”

“계속 옆에 있길 바라면 그렇게 할게.”

“그것 참 든든하네.”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가는 실을 잣듯이 조금씩, 쉬어가며 천천히 이어진다.

 

“나는 고아여서 월세가 싼 낡은 건물에 살았는데 어느날 건물이 무너졌거든. 꼼짝없이 죽는구나, 억울한 목숨줄이 드디어 끊어지는구나 싶었는데 기적적으로 살았어. 구해주셨거든.”

“응.”

 

"우연히 입사한 회사의 팀장이셨어."

 

"응."

 

"그리고, 빨리 가셨지."

 

케일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알베르가 손으로 두 눈을 덮는다.

 

"떠올리지 마."

 

"무슨 생각하는지 아네."

 

"뻔하지."

 

어깨에 뺨을 문지른다. 자상하네. 위로하고 위로 받아본 사람처럼. 케일은 다시 눈을 감았다. 대답을 재촉하지 않는다. 그저 기다린다. 먹먹한 침묵이 불편하지 않았다.

 

"여행을 가려면 베니스는 가보라고 하셔서 왔는데."

 

"응."

 

"베니스의 야경도 보고. 살라고, 가는 사람이 있으면, 오는 사람도 있다고. 그게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이었어."

 

"응."

 

"살았어. 혼자. "

 

"그래. 잘 견뎠어."

 

 

뺨에 흐르던 눈물은 말라 붙었다. 엄지손가락을 펴 조심스럽게 눈물자국을 닦아낸 알베르가 케일을 침대에 눕혔다. 쓰러지듯이 시트를 쥐고 상체를 기울인다.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에 묻어 있는것은 자책이다. 잠든 얼굴을 그려내듯 아픈 시선을 떨어뜨린다. 뺨에 부드럽게 문지른 입술로 혼잣말을 밀어냈다.

 

"그거 아나. 난 몰랐던게 아니야."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길 바랐어."

 

"그래야, 네가 사니까."

 

 

 

***

 

 

 

케일은 항공권을 확인했다.  오후 9시 비행기다. 공교롭게도 알베르와 같은 항공편이었다.

 

"정말 우연 맞아?"

 

"이쯤되면 우연이 아니라 인연 아닌가?"

 

"으."

 

케일은 질색하며 손을 내저었다.

 

"마지막으로 가고 싶은 곳은?"

 

"딱히요."

 

"베니스까지 와서 아깝잖아. 아직 시간은 여유로우니까."

 

바다 위로 막 떠오르는 해가 짙은 그림자를 만드는 시각. 이르게 잠에서 깨어난 케일과 잠 한숨 자지 않은 알베르가 숙소를 나왔다. 잠을 자긴 한 거냐는 말에 알베르는 며칠은 안 자도 된다는 말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리곤 막 생각났다는듯이 말한다.

 

"부라노 섬은 어때?"

 

"어딘데."

 

"베니스에서 가장 독특한 건물들을 볼 수 있는 곳."

 

 

 

산타루치아 역에서 수상버스로 갈아탔다. 내리 바다만 바라봤으니 질릴만도 하지만 시각마다 다른 바다 풍경을 보는 것은 조금도 시시해지지 않았다.  눈으로 배가 캠트레일처럼 긴 물꼬리를 만드는 것을 쫒는다. 몇 개의 작은 군도를 지나쳐 멀리서도 알록달록한 섬이 나타났다.

 

"신기하지?"

 

알베르가 어깨에 턱 머리를 올렸다. 키는 알베르 쪽이 좀 더 크다. 상체를 숙인 불편한 자세가 좋은가보지. 뜨끈하게 몸을 덥히는 체온이 싫지 않아서 말리지는 않았다.

 

배가 좀더 다가가자 연두색, 분홍색, 파란색, 빨간색 등 알록달록한 원색으로 칠해진 것들이 집들이라는걸 알았다. 케일이 미간을 좁혔다. 알베르가 웃음을 삼켜넣는다.

 

"저게 뭐라고 생각한거야?"

 

한쪽 창문에서 반대쪽 창문 사이를 빨랫줄이 가로지른다. 집마다 여러개 걸려있는 빨랫줄에는 마찬가지로 색색깔 빨래들이 바람에 이러저리 흔들거렸다.  

 

수상택시에서 내려 알베르와 나란히 걸었다. 미로를 걷듯 복잡했지만 어느쪽으로 가든 원점으로 돌아온다. 청명하게 푸른 하늘이 머리 위에 떠 있다. 알록달록한 마을을 뛰노는 아이가 된 듯한 기분이다.

 

"와보길 잘했지?"

 

"어."

 

가벼운 산책을 즐겼다. 오고가는 시간이 있어 오래 묵기는 어려워도 아름다운 섬을 눈에 담기엔 충분했다.

 

"아경도 아름다워.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지."

 

"아쉬워?"

 

"나보다는 네가 그렇지."

 

발이 뚝 멈춘다. 문득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어렴풋한 꿈처럼 지난 것이 현실인지 아닌지를 잊어버린다. 후덥지근한 바람 한 줄기가 지난다.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에 시야가 어지럽다. 고작 몇 걸음 앞에 서 있을 뿐인데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서, 알베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케일은 눈을 깜빡여 들이치는 햇빛을 쫒아내려 애썼다. 기억하지 않으면 물기없이 바스라져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은 기분이 들었다.

 

 

 

"돌아가면 뭐할 생각이야?"

 

"글쎄. 널 보러 갈까?"

 

농담 삼아 상황을 넘어가려는 것이 보인다. 케일의 눈이 가늘게 떴다. 수상택시가 도착한다. 알베르는 냉큼 올라탄다. 안타? 소리에 케일도 마지못해 택시에 올랐다.

 

두 사람을 태운 택시가 숙소로 향했다. 어쩐지 뚝 끊겨버린 대화가 신경쓰였다. 베니스를 떠나면 시들어버릴것처럼 이파리가 쳐진 표정으로 씻겨 내려가고 있는 금발 남자가 눈에 밟혔다. 케일은 뭐라 말을 붙이는데는 재주가 없었다. 곤란해하는걸 눈치챈 알베르가 돌아본다. 웃는 얼굴이 희미하다. 케일은 한순간 숨이 멎는것처럼 일어나는 긴장감에 속눈썹을 떨었다.

 

 

 

***

 

 

 

"베니스 여행은 즐거웠어?"

 

"그럭저럭. 좋네."

 

웃음이 아스라히 멀다. 다시 창으로 고개를 돌리는 얼굴을 훽 돌리고 무심하게 말을 꺼냈다.

 

"너는."

 

말이 없다. 케일이 옆자리를 더듬었다. 잠깐 스치고 물러나는 손에 손가락을 얽었다. 가늘게 떨리는 손이 예감을 더했다. 케일은 힘을 주어 알베르의 고개를 돌렸다. 그저 신경쓰일뿐이던 돌조각은 이제 모른척 할 수 없을만큼 덜그럭거린다. 뺨에 얹은 손에 힘이 담기고 암갈색 눈동자에 완고함마저 서렸다. 알베르가 느리게 속눈썹을 내리 감았다.

 

"말해."

 

"뭐를."

 

"오늘이 마지막 날인것처럼 내가 영영 사라져버릴 것처럼 굴잖아. 너. "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내가 바보로 보이지. 알베르 크로스만."

 

"......"

 

마주친 눈동자가 흔들린다. 케일은 희게 질릴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굳게 닫힌 입술과 아릿하게 슬픔이 담긴 눈에 숨이 턱 막혔다.

 

""왜. 나를 알고 있는지,"

 

"......"

 

"다 알면서 나한테 접근했잖아. 넌 처음부터 나를 알고 있었어. "

 

몰랐던 건 아니다. 새듯이 흘러나온 수상쩍음이 시간이 갈수록 불안을 더했다. 뺨을 짚은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알베르가 느리게 울대를 밀었다. 눈동자가 망설임으로 미세하게 흔들린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가 바람이 일렁이듯했다. 알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었다.

 

"틀려?"

"아니라곤 못하겠네."

"설명해."

"못해. 전부 다 잊어버릴거잖아."

“이상한 말이네. 전부 다 겪어 본 사람처럼 말하고 있잖아.”

 

알베르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건 영영 열리지 않을것처럼 닫힌 문 같았다. 케일은 가느다랗게 떨리기 시작한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애썼다.  

 

“말해.”

“......”

“......”

“미안.”

 

눈 안쪽이 뜨거웠다. 목 안쪽에서 쇠를 긁는듯한 소리가 났다.

 

“그러면, 우리도 여기서 끝나는거겠지.”

“그래.”

 

둘다 아무말도 올리지 않았다. 그게 말 없는 이별이라는 것을 알았다.

차라리 시작하면 안됐을텐데. 그걸 몰랐던 것이 아닌데. 아련하게 피어오른 웃음이 아팠다.

 

 

 

***

 

숙소로 오는 내내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와의 뜻밖의 동행도, 몸을 겹치고 사랑을 속삭이던 모든 말들이 신기루처럼 멀었다. 공항으로 가기 위해 짐을 정리했다. 가져온 것이 많지 않아 챙길것은 별로 없었다. 작은 캐리어 하나만 울퉁불퉁한 도로 위를 굴렀다.

 

"더 챙길것은 없나?"

"없어. 아무것도."

“그래.”

 

알베르는 공항으로 가는동안 동행했다. 케일의 캐리어는 알베르의 손에 들려있다. 빈 손을 만지막거리다 그만뒀다. 부탁한 것도 아니고, 거절한 것도 아니다. 케일은 필요없다는 말도 그러지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함께 했다.

 

느리게 걸었다. 미련 같은 발걸음이 뒤따랐다. 베니스의 파란 하늘과 맑은 바다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한 여름밤의 꿈 같은 여행이었다. 이 모든 것이 꿈이었는지 아니었지 물음같던 생각을 바다에 던져넣었다.

 

 

 

공항에 도착하자 짐을 넘겨 받았다. 아무것도 챙기지 않은 것은 알베르도 마찬가지였다. 케일은 알베르를 가로막고 섰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건조한 표정이었다.

 

"마지막으로 할말은 없어?"

“네가 그리울거야.”

“그것말고는.”

 

거리가 좁혀졌다. 바람이 스치듯 먹먹한 마음이 입술에 내려앉는다.

 

“잘가.”

“그래.”

 

케일은 등을 돌렸다.

 

 

 

***

 

 

 

수속은 빨리 끝났다. 케일은 9시 비행기 도착지를 알리는 전광판을 느리게 훑었다. 눈이 멍했다. 던져진 돌에 맞아 파문이 이는 호수처럼 가슴 속이 자꾸만 술렁거렸다. 9시 이륙을 알리는 안내문이 흘러나오는 소리가 재촉하듯이 케일을 잡아 끌었다.

 

케일은 몸을 일으키다 말고 불현듯 어떤 생각에 사로잡힌다. 베니스에 남겨져 버린 어떤 남자에 대한. 입술이 서서히 다물린다. 돌아온 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건 깨닳음처럼 찾아왔다.

 

"인생은 영화가 아니야. 지나가버린 것은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있는 힘을 다해 움켜쥘 수 밖에 없다고. 안 그러냐 록수야?"

 

지금 이 이야기의 주연은 케일이다. 바보같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일어난다. 케일의 인생에 후회는 단 한번이면 족했다. 캐리어를 저 대신 자리에 둔 채로 케일은 에스컬레이터를 걸어내려갔다. 모습이 뛰는 것이 가까웠다. 그동안 생각은 점차 하나로 모였다. 저 비행기를 타고 사라지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너는 무엇을 알고 찾아왔을까. 금방이라도 사라질 사람을 대하듯 굴었을까. 너를 놓치면 나는 어떻게 될까.

 

우리는 왜 베니스에서 만났을까.

 

새파란 베니스의 하늘이 심장 위에 떨어졌다. 케일은 목끝까지 차오른 숨을 골랐다. 인파들 속에서 단 한사람을 찾는것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것만큼이나 힘들 것이다. 같은 시각에 오르는 비행기. 따로 떨어졌지만 운이 좋다면 기내에서 마추칠지도 모르는 인연. 그런데도 케일은 비행기를 타는 것을 포기하고 밖으로 나왔다. 시간은 이미 9시를 넘어 있었다. 놓쳐버린 비행기는 멈춰 서지 않는다. 조금 전으로 시간을 되돌아갈 수도 없다. 그런데도, 나왔다.

 

심장은 예감처럼 요동쳤다. 이정표나 나침반도 아닌 감각에 의지했다. 역 1층으로 내려와 투명한 전신창을 물끄러미 쫓고 있는 금발 남자를 발견했을 때는 모든 생각이 사라져 있었다.

 

"알베르."

 

속삭이는 것에 가까운 목소리가 나왔다.  금새 파리한 안색을 한 채 건조한 눈으로  밖을 쫒던 남자가 숨이 멎은듯한 얼굴로 돌아본다. 케일은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듯한 얼굴로 웃었다.  발목을 적시고 찰랑일 뿐이던 물에 이젠 머리 끝까지 잠긴듯 했다. 조금씩 소매를 적시는 비처럼 찾아와 속절없이 휩쓸고 지나가버린 것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케일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어, 떻게. "

 

"알베르, 당신을 잊어버릴 수 있을리가 없잖아."

 

"그거 기쁜데."

 

"그러니까 이제 당신 얘기를 듣고 싶어."

 

케일은 부쩍 마르게 느껴지는 등을 힘주어 끌어 안았다. 마주 닿아오는 온기가 기꺼웠다. 물들어가는 서로의 체온을 느끼면서 알베르가 대답했다.

 

"그래. 얼마든지."

 

 

 

***

 

 

 

오늘도 너에게 다가간다. 특종을 위해 공주에게 접근했던 로마의 휴일의 기자처럼. 나는 너를 알고 있으니까, 이것은 순수한 호의 같은것이 아니다.

"You need some help?(좀 도와줄까?)"

 

"Yes. I need. (네. 필요해요.)"

 

우리의 대화는 언제나 한결 같다. 자연스럽게 옆 자리를 차지하고 동행을 자처 하면 너는 밀어내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의 만남은 시작된다.

 

모르는척, 처음 만난 척, 마음이 약한 척 네 주위를 맴돈다. 그러면 네 눈은 언제나 나를 향한다. 그건 본능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 닮았고 사랑하는 사이였으니까. 그러니까, 너를 오래 알았던 나는 알 수 있다.

 

 네가 베니스에 머무는 아주 잠깐동안은 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이다. 누군가 파고 들기 충분할정도로 텅빈 마음은 알베르를 아프게 한다.

 

일 년에 고작 이틀.  이틀간의 휴가.

 

우리는 산 마르코 광장에서 만나 카페 플로리안으로 향한다. 그 곳에서 우리는 짧은 대화를 나누고 헤어질 것이다. 다시 만날때 우리는 서로에게 마음이 이끌리겠지. 우리가 자연스레 연인이 되는 것은 오직 그 하룻밤 뿐이다.

 

 

 

***

 

우리의 이야기는 공항에서 끝을 맺는다. 마지막 키스를 나누고 먹먹한 이름을 입 안에 굴리면 너는 비행기를 타고 나비처럼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 돌아오지 않는다. 모든 것을 잊어버린채, 너인, 네가 아닌 또 다른 사람과 만난다.

 

몇 번인지 기억도 하지 못할만큼 반복되는 시간동안 알베르는 포기를 배웠다. 오래전 잃어버린 연인을 살리는 대신 스스로 짊어진 굴레였다. 그 무게에 삶이 짓눌려갈 때면 네가 찾아온다. 새파란 하늘 아래 서 있는 네 앞에서 시간은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런데 이번은 조금 달랐다. 수천번을 쌓았던 시간이 조금씩 어긋났다.

 

"뭐 낯선 여행지에서도 인연은 이어지는 법이니까. 내가 볼땐 우리 또 만날 것 같거든."

 

케일에게 명함을 쥐어주었던 것도 처음.

 

다쳤다는 말에 전화를 받고 놀라 달려오기도 처음.

 

네가 나를 궁금해하는 것도 처음.

 

온통 처음하는 것 투성이다.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여기서 한 걸음이라도 잘못 걸으면 미로같은 시간도 견디지 못하는것이 아닌가하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말해.”

 

그래서 심장을 쥐어짜내는 듯한 말에도 대답하지 못한다. 끝을 끝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9시가 되면 영영 나를 잊어버릴거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거면서. 말을 혀밑으로 삼켜넣었다. 헛된 미련은 잘라내는 편이 좋다. 그래서 끝까지 대답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같을거라고 생각했다.

 

 

 

***

 

건조하게 풀어나가던 이야기가 끝나자 시야가 머리칼이 만든 붉은 장막 속에 가려진다. 알베르가 엄지손가락으로 뺨을 더듬었다. 눈이 붉다.

 

“바보같네. 다 잊어버릴걸 알면서 반복하고, 모르는척하고, 그것마저도 사라질까봐 불안해하고.”

“.....”

“이제 알겠어. 내내 들던 기시감이 뭔지, 당신이 왜 낯설지 않았는지.”

 

“......”

“내가 당신을 기억하지 못해서, 영영 떠돌고 있었던거야.”

“그러니 요금은 비싸게 받을거라고 했잖아.”

 

허탈한 웃음이 샜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으면서. 케일은 메이려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다 내가 영영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려고 했어.”

“그럼 또 네가 올 날을 기다리면서 살고 있었겠지.”

“바보같네.”

"맞아. 그래도 사랑은 대가를 바라고 건네는게 아닌거, 알고 있잖아."

 

케일은 말대신 입꼬리를 밀어올린다. 고작 그를 찾겠다는 이유로 놓쳐버린 비행기가 생각났다. 피차 같은 꼴이라는게 떠올라서.

 

케일은 어깨를 붙잡은 손을 떼어냈다. 그제서야 얼굴이 보인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글쎄."

"나는 너를 기억하고, 우리는 아직 베니스에 있는데.“

 

“이번엔, 제대로 여행할까? 우리가 서로를 잊어버릴 수 있을 때까지.”

“그래.”

 

말없이 눈동자가 맞주쳤다. 똑같은 표정이 그리듯이 떠오른다.

처음 사랑에 빠졌던 그 날처럼.

 

 

 

케일은 가족을 잃고 베니스에 찾아온다. 짐이 될만한 것들은 챙기지도 않은 채 비행기 티켓만 들고서. 이 허술한 여행객은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 하지 못하고 사교적이지도 못하다. 일행이 있는 것도 아니고 베니스의 지리를 잘 알고 있지도 않다. 이 허술한 여행객은 한 계절 소매치기들의 타켓이 되기 충분하다.  알베르가 곤란한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는 선량한 사람이 되어 말을 걸면,  케일은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__________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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