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장에 홀로 곧게 내려서던 그녀의 뒷모습이
바다의 지배자라는 칭호에 걸맞게 뿜어내던 피부가 따끔 거릴 정도의 위엄이
심해를 들여다보듯 끝이 없어 보였던 푸르른 눈동자가
물과 한 몸이 되듯 반투명해지던 그녀의 손끝이
그녀의 손짓 하나에 움직이던 물들의 찰랑거리던 소리가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흩날리던 한없이 투명하게 푸르렀던 머릿결이
머리칼이 흩날림에 따라 가끔씩 모습을 드러내던 등의 큰 흉터가
계속.
계속해서 생각이 났다.
***
로잘린은 자신의 머리를 꽉 메운 푸른색을 떨쳐내려 고개를 저으며 감았던 눈을 떴다. 그녀의 눈앞에는 방금 전까지 생각하던 한 여인을 꼭 닮은 푸르른 바다가 드넓게 펼쳐져있었다. 그늘을 만들어줄 만한 것도 없는 텅 빈 해변 가에 로잘린은 홀로 앉아있었다. 철썩거리는 파도소리만 가득한 그곳에서 로잘린을 환영해주는 것은 쨍쨍한 햇빛뿐이었다. 피부위로 내리쬐는 햇볕이 꽤나 뜨거웠다. 더위라도 먹은 건가. 로잘린은 멍하니 출렁거리는 파도 위에 부스러지는 빛들을 바라보았다.
죽음의 협곡에서의 전투 이후, 한 여인이 좀처럼 그녀의 머릿속에서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바다를 닮은 이였으니까, 그래서 생각이 나는 것일 거다. 여름이 되어 날도 더워졌으니까. 그래서 시원한 바다가 생각나는 걸 것이고, 바다를 떠올리니 그녀가 덩달아 생각이 나는 것일 거다. 별다른 이유는 없을 것이다. 바다에 대한 생각은 한 톨도 없었고 오로지 그 여인의 생각만 하고 있었다는 걸 로잘린은 잘 알고 있었으나 애써 모른 척 넘겨버렸다.
바다로 돌아갔으니 이제 다시는 만날 일이 없겠지. 앞으로의 일에 고래족이 개입할만한 문제가 생길 것 같지도 않고. 원래 바다의 종족들은 육지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니까. 왠지 섭섭한 마음이 들어 로잘린은 자신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애당초 그녀와 고래족 사이에 별다른 접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그녀와 친한 케일 공자가 친분이 있었기에 알게 된 이들이었다. 건너 건너 아는 사이. 그것이 그녀와 고래족의 사이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었다. 그러니 그들은 케일 공자를 통하지 않으면 연락조차 할 수 없는 이들이었다. 그걸 잘 알고 있었음에도 답답해지는 가슴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는 푸른빛을 도저히 떨쳐내기 힘들 때 로잘린은 습관적으로 바닷가를 향했다. 푸르죽죽해지던 마음이 파아란 바다를 보면 정화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여인을 닮아 눈이 시릴 정도로 투명하게 푸르른 바다. 로잘린은 다시 고개를 들어 바위에 닿아 하얗게 부셔지는 파도를 쳐다보았다.
“로잘린 씨?”
저 멀리서 들려온 작은 목소리가 파도소리에 묻히지 않고 그녀의 귀에 가 꽂혔다.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 로잘린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방금까지 만나고 싶다 생각하던 이가 그녀의 바로 앞에서 바닷물에 발을 담근 채 서있었기 때문이다. 푸른 머리의 여인 뒤로 햇빛이 눈부시게 내리쬈다. 바닷물처럼 반짝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로잘린은 순간 자신이 환상을 보는 것인가 고민했다.
“이런데서 뵙네요.”
얕은 바닷물에 서있던 그녀는 찰박거리는 소리를 내며 로잘린을 향해 걸어왔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밀려들고 밀려나가는 바닷물에 따라 그녀의 옷자락이 찰랑거렸다. 로잘린은 위티라가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올 때까지 제자리에 굳어있었다. 위티라는 자신이 가까이 다가왔음에도 미동도 없는 빨간 속눈썹을 보곤 허리를 숙여 로잘린의 이마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로잘린 씨? 어디 아파요?”
햇볕에 뜨겁게 데워진 이마위로 서늘한 기운이 내려앉았다. 차가운 물이라도 맞은 듯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든 로잘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깜짝 놀란 위티라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나 로잘린의 상태를 살폈다. 시선을 어디로 돌려도 온통 푸른빛이었다. 로잘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의 옷자락을 쥐어 잡으며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오..오..오! 오랜만이네요! 위티라씨! 하. 하하. 이런 우연이!”
망했다. 삑사리로 시작한 자신의 말이 창피해 로잘린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왜 이렇게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리는지 알 수 없었다. 평범하게 인사를 건네면 되는 일인데, 바보같이! 로잘린은 방금 전 멍청해보였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옷자락을 더 꽈악 그러쥐었다. 옷자락이 그녀의 손에서 나온 땀으로 젖어 들어갔다. 한참이 지나도 답이 없자 로잘린은 작은 희망을 품고 고개를 들었다. 혹시 방금 바보 같았던 자신의 목소리를 못 들은 게 아닐까? 그러나 그녀의 기대와 달리 위티라는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소리 죽여 웃고 있었다. 로잘린의 얼굴이 잘 익은 문어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자신의 절반도 채 살지 못한 이가 전장에서 빠르게 상황파악을 하여 모두를 지휘하던 모습이 퍽이나 인상 깊었었기 때문일까. 위티라는 제 눈앞의 붉은 머리의 소녀가 이제야 제 나이대로 보여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서 우물쭈물 거리고 있는 이를 다정하게 쳐다보았다. 위티라는 아직도 전장을 감싸던 붉은 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집중함에 따라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붉은 마나가
그녀의 손짓 하나에 빨갛게 불타오르던 전장이
그 연기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반짝거리던 빨간 눈동자가
침착하게 모두에게 지휘를 내리던 단호한 목소리가
핏줄이 터져 눈이 점점 붉어지는데도 신경 쓰지 않던 모습이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에도 상관하지 않고 마법을 성공시켰다며 웃던 표정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날 협곡을 가득 메우던 불의 열기가 지금껏 겪어보지 못했던 열기였기 때문일까. 그날의 열기와 함께 붉은 머리칼의 여인의 모습이 뇌리에 깊게 각인 되었는지 더위가 심해질수록 머릿속이 점점 붉은색으로 가득 찼다. 그런 생각을 떨쳐보려 기분 전환 차 나왔던 해변에서 붉은 소녀를 만나니 반가울 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너무 오래 웃으시는 거 아니에요?”
“크흡... 죄송해요. 귀여워서 그만.”
로잘린의 볼멘소리에 위티라는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가라앉혔다. 여전히 그녀의 입가는 예쁜 호선을 그린 상태였다. 위티라에 뒷말을 듣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던 로잘린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놀리지 마세요...”
놀리는 거 아닌데. 위티라는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녀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의며 로잘린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바다엔 무슨 일이에요?”
위티라의 물음에 로잘린을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생각해내라, 로잘린! 천재 소리 듣던 머리는 다 어디다 팔아먹은 거야!’
로잘린은 발이라도 동동 구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땅한 핑계거리가 떠오르지 않자 입술을 잘근 잘근 깨물던 로잘린은 위티라 뒤에 보이는 바다를 보곤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 그... 그러니까.. 더우니까! 바다가 보고 싶어져서요!”
아까까지 본인에게 되뇌던 변명거리가 로잘린의 입을 향해 흘러나왔다. 그녀의 말에 위티라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턱을 매만지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말간 파란 눈이 그녀의 붉은 머리를 흩었다. 바닷물이라도 마신 듯 로잘린의 입안이 바짝 바짝 말라갔다. 한동안 아무 말 없던 위티라는 잘못이라도 한 강아지 마냥 제 눈치를 보는 로잘린의 모습에 피식 미소 짓고는 그녀의 옆에 가 앉았다. 로잘린은 쭈뼛거리며 위티라를 따라 모래밭 위에 앉았다.
“그래도 만나서 좋네요. 마침 로잘린 씨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오랜 침묵 끝에 나온 위티라의 말이 너무나도 의외의 것이어서 로잘린은 눈을 크게 뜨고 그녀에게 되물었다.
“제 생각을요?”
“네. 그날 전투에서 로잘린씨의 모습이 꽤나 인상 깊어서 전투의 열기와 함께 기억에 남았었나 봐요. 날이 더워지니까 그날의 열기와 함께 로잘린 씨가 계속 생각나더라고요. 한 번 다시 만나 뵙고 싶었는데, 케일공자는 바쁠 듯하니 귀찮게 하기 어려워 고민 중이었는데 이렇게 우연히 만나니 좋네요.”
“저도! 위티라씨를 만나고 싶었어요!”
위티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로잘린은 위티라를 향해 몸을 돌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녀의 눈이 용의 마법을 구경할 때처럼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위티라의 두 눈에 드물게 당황스러움이 서렸다. 위타라가 아무 말 없이 두 눈을 깜빡거리고 있자, 로잘린은 그때서야 자신의 상체가 그녀를 향해 상당히 기울여져 있단 것을 알아채곤 빠르게 제자리로 가 앉았다. 그녀는 아까부터 애처럼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고래족을 통치하던 그녀의 모습처럼 자신도 멋진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는데 자꾸만 몸이 지 멋대로 움직였다. 그 때, 위티라의 박수 소리가 들렸다. 짝, 하는 소리에 로잘린은 반사적으로 위티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얼굴로 청아하게 웃고 있었다.
“정말요? 기뻐라. 마음이 통했나보네요.”
위티라가 어떤 의도로 마음이 통했다고 말하는지 알고 있지만 그녀의 마음은 그걸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작정했는지 세차게 뛰었다. 두근거리는 소리가 죽음의 협곡에서 터지던 폭탄들의 소리보다 더 큰 것 같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너무 더운 곳에 오래 앉아 있어 열사병이라도 난 것인지 뜨거워진 머리가 아찔 거렸다.
“그래서, 요즘은 뭐 하고 지냈어요?”
후끈거리던 열을 위티라의 청량한 목소리가 시원하게 식혀주었다. 로잘린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했던 걱정과 다르게 그녀의 입에서는 쉼 없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재잘거리는 로잘린의 목소리를 들으며 위티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10년 만에 재회한 사람들인 마냥 시간가는 줄 모르고 서로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새파랗던 하늘에 어느덧 붉은 빛이 번져가고 있었다. 저물어가는 태양을 보며 위티라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쉽지만 먼저 일어나야겠네요.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운 것 같아서요. 그럼, 원하시는 만큼 바다를 즐기다 가세요.”
위티라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한 후,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찰박 찰박, 발등을 간신히 적시던 물살이 어느 덧 발목까지 차올랐다.
“위티라 씨!”
뒤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 바다로 걸어 들어가던 위티라의 걸음이 멈췄다. 그녀가 뒤를 돌아서자, 그녀의 시야를 붉은 빛이 장악했다. 저녁노을을 한 꺼풀 덮어씌워 붉게 물든 모래 위에 아까까지 그녀와 신나게 얘기하던 여인이 꼿꼿한 자세로 서있었다. 전장에서 마법사들을 휘어잡던 그 자세 그대로 로잘린이 그 곳에 서있었다. 위티라는 그녀의 선명한 붉은 빛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로잘린은 바람에 흩날리는 붉은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긴 후 위티라와 눈을 마주쳤다. 여름의 태양같이 붉은 눈동자가 위티라의 푸른 눈동자를 마주했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저물어가는 햇빛 속에서도 바다는 푸른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로잘린은 바람에 따라 물결처럼 굽이치는 푸른 머리칼을 눈에 담았다. 찰박, 찰박, 파란 물결 소리가 그녀의 발끝에서 울려 퍼졌다. 로잘린 앞으로 다시 다가온 위티라는 로잘린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로잘린은 손을 펼쳐 위티라가 준 것을 확인했다. 개인 연락이 가능한 조그만 마법구가 그녀의 손 위에 놓여 있었다.
“로잘린 씨라면 언제든 환영이니 연락주세요.”
위티라는 웃으며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들었다. 로잘린은 홀린 듯 그녀의 손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하얗지만 굳은살이 박혀있는 손의 엄지손가락과 살짝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으며 흉터가 가득 남아있는 손의 엄지손가락이 맞닿았다. 꾸욱, 엄지손가락을 누른 위티라는 고개를 숙여 로잘린과 눈을 맞췄다. 로잘린의 붉은 눈동자 안에 푸른 웃음이 가득 차올랐다.
“약속한 거예요.”
그렇게 말한 위티라는 몸을 돌려 바다를 향해 뛰어들었다. 어느덧 고래로 변한 위티라는 순식간에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이 점이 될 때까지 바다를 쳐다보고 있던 로잘린은 숨을 몰아 내쉬었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빨간색을 띄고 있는 감정이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 로잘린은 붉게 물듯 자신의 귀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큰일 났다.”
이 더운 여름, 그녀는 시원한 바다에게 단단히 홀려버린 듯 했다. 아무래도 옷에 밴 짭짤한 바다 내음이 한동안 빠지지 않을 것 같았다.
__________ fin.
치즈하나
@cheese_hana
[여름의 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