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일은 멍하니 주변을 올려다보았다. 쨍하게 비치는 햇볕 아래 등 뒤로는 울창한 숲이 있었고, 앞쪽으로는 넓고 파란 바닷물이 넘실댔다. 케일은 적당한 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를 펴고 더운 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옆에는 늘어진 온과 무더위에도 지치지 않은 론이 서 있었다.
이곳은 정글의 끝자락의 해변으로 정글의 여왕 리타나에게 직접 받은 케일의 개인 소유지였다.
"인간아, 물빛이 엄청 예쁘다!"
"그러네. 구경하러 갔다 와."
"나도 갔다 온다는 건데!"
작고 검은 용이 뽈뽈 날아가는 길을 홍이 따라갔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오길 잘했지. 사실 여기에 온 이유는 별것 아니었다. 무더운 날씨가 한몫했고, 마침 바다가 보고 싶었고, 라온이 이곳은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봤기에. 노후를 위해 준비한 곳이라 큰 신경을 안 써서 케일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리타나에게 가도 되는지 물어보고 흔쾌히 대답을 얻어내었다.
<공자 땅인데 허락 맡고 올 필요가 있나요? 언제든 오셔도 괜찮아요!>
"아주 흔쾌한 대답이었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아무것도. 케일은 나지막이 대답하며 론이 건네는 레모네이드를 건네받았다. 얼음이 동동 떠 있는 레모네이드는 머리가 띵할 정도로 시원했다. 늘어진 온을 쓰다듬자 기분 좋은 듯 골골거렸다. 이게 바로 휴식이지.
"간만에 아무 생각 없이 쉬니까 좋네."
"그렇다는 건데! 자주 쉬는 게 좋다는 건데!"
비크로스와 최한은 리타나를 따라 요리 재료를 찾으러 정글 안으로 들어갔고, 라크는 동생들에게 수영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로잘린은 에르하벤을 따라다니며 열심히 질문하고 있었다.
"역시 에르하벤님은 대단하세요. 이 정도로 많은 인원을 대규모 텔레포트 마법으로 한 번에 이동시키시다니…!"
"텔레포트 마법은 인간도 할 수 있다. 로잘린, 네 경우에도 최상급 마정석을 사용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에르하벤은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해변을 거닐며 로잘린의 말에 대답해주고 있었다. 케일은 흥, 하고 코웃음 쳤다. 누가 용이 이기적이라고 했는지 정말…. 그나저나 계속 이렇게만 쉴 수 있었으면 좋겠네. 하지만 그의 바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인간아, 왕세자다!"
물놀이를 하다 파드득 날아온 라온이 붉게 빛나는 영상구를 들이밀었다. 생각보다 아주 일찍 연락하시는군. 반짝이는 영상구를 받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결해줘. 나 잠깐 산책하러 갔다 올 테니까 다시 가서 놀아. 위험할 수 있으니까 너무 멀리는 가지 말고."
"알았다, 인간!"
영상구를 연결해준 라온은 다시 바닷가로 날아갔다. 축축한 영상구를 대충 손으로 쓱쓱 닦고는 가볍게 인사를 했다. 간만에 보는 그의 얼굴은 죽을상이었다.
"찬란한 로운의 별이신 알베르 왕세자 저하께…."
- 됐고, 너 지금 어디냐?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정글에 있는 제 땅이요."
- 그럼 공자는 언제 돌아오는지?
"휴가 끝나면요."
- …휴가는 언제 끝나지?
"제가 집에 가고 싶을 때요."
그의 끝나지 않는 질문 세례에 케일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대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알베르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왜 그러지?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나?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보이나?
케일은 그제야 알베르의 뒤쪽에 눈이 갔다. 그의 집무실인 줄 알았지만, 그곳보다 더 눈에 익은 장소였다. 어디지? 왕궁에 저런 곳이 있었나? 아니, 왕궁이 아니라 저곳은-
"제 방에서 뭐 하십니까?"
- 빨리도 보는군. 의논을 핑계로 얼굴 좀 보러 왔더니만, 그새 가버렸다더군.
얼굴이야 매일 영상구로 보고 있지 않나, 라고 말하기엔 케일도 알베르가 생각나던 참이었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보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으니 해변에 와서도 그늘에만 앉아있었다. 같이 놀고 싶지만 바쁜 사람임을 알기에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러 저를 보러 헤니투스가에 왔다니, 이 정도면 애초에 부를 것을 그랬나.
"이왕 거기까지 간 김에 여기도 들르시죠?"
- 무리야. 여기까지 오는 데에 상당한 시간을 써버려서 말이야. 준공식 일정으로 만들어버렸더니 텔레포트도 마음대로 못 쓰고, 여러모로 불편하군.
허, 심지어 준공식 일정이란다. 저를 만나러 오는 것을 준공 식일정으로 잡았으면서, 정작 본인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니. 케일은 기가 차면서 기뻤다.
"미리 말했으면 엇갈릴 일이 없지 않습니까."
- …놀라게 해줄 생각이었지. 한 번쯤은 놀란 표정을 보고 싶었으니까.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지? 아-, 어떡하지. 귀엽네. 케일은 속으로 말을 삼켰다. 연인이 되고 난 다음부터 종종 그가 귀여워 보여서 큰일이었다. 사실 그전에도 별로 다르진 않았지만.
"사실 방금도 상당히 놀랐습니다. 저하가 제가 없는 제 방에 계시기에."
- 그런 것 치곤 별 감흥이 없군. 그래서 내가 있는 자네의 방에는 언제 돌아올 참인가?
"휴가가 끝나면요."
- …….
케일이 앞서 했던 말을 다시 뱉자 알베르는 더 뚱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도착한 지 하루도 되지 않았고, 다들 이렇게나 즐거워하고 있는데. 케일이 간다고 하면 말리더라도 따라올 사람들이랑 용들이다.
"쉬는 김에 푹 쉬고 가야지요. 저만 온 것도 아니니."
- 자네는, 후….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 했는데. 자네는, 내가, 보고 싶지도 않나?
"지금, 뭐라고…"
케일은 처음에 자신이 헛것을 들었나 했다. 하지만 영상구 너머 알베르의 볼이 여느 때보다 붉어서 잘못 들은 게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다. 저렇게까지 귀여워도 되는 거야? 부끄러워하는 연인이 너무나 귀여운 나머지 케일은 당장이라도 돌아가 얼굴을 자세히 보여달라고 하고 싶었다.
"얼굴 가리지 말고 보여주십시오. 지금이라도 실컷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의 귀여운 모습을. 뒷말을 삼키며 영상구를 톡톡 치니 알베르는 이미 상당히 진정한 얼굴이었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케일이 말을 이었다.
"정 그러시면 오늘 그곳에서 머무는 거로 하고 본모습으로 여기 오시죠. 저택이 좀 그러시면 해리스 마을에 제 별장도 있습니다. 공식 일정은 거기서 쉬시는 거로 하고 이쪽으로 텔레포트 해오시죠. 저도 저하가 보고 싶거든요."
- 읏, 케일,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조금 전에 보고 싶다고 한 분이 그런 말을 하십니까?"
내가 먼저 보고 싶다고 했냐, 네가 먼저 그랬다. 케일의 지적에 알베르의 볼이 다시 붉게 물들었다. 준공식 일정으로 왔다면 어느 정도 일거리를 들고 왔을 것이다. 그에 대해 논의를 하기 위해 간다고 했을 테니. 그 정도야 같이 한다면 한나절이면 금방 하겠지. 케일은 머릿속을 데굴데굴 굴리며 생각을 끝냈다.
"오시는 김에 일거리도 들고 오십시오. 도와드리겠습니다."
- 진심인가? 자네가 자처해서 도와준다고?
"네. 하지만 업무가 끝나면 나랑 놀아야 해, 형"
케일이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자 알베르도 똑같이 웃었다. 라온이 있었다면 '약한 인간이랑 왕세자가 똑같이 웃고 있다!'라며 말할 정도로 닮은 웃음이었다.
- 좋지, 동생. 오랜만에 같이 놀아볼까?
"그래. 마음 편하게 왔다 갔다 하기엔 해리스 마을에 있는 내 별장이 좋을 거야, 형."
- 알았다. 오늘 저녁에는 그쪽으로 갈게. 그러니까 자지 말고 기다려, 동생."
간만에 실물이라. 영상구는 꺼졌지만, 케일은 생기가 충만했다. 얼마나 함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일거리는 좋은 핑계지, 음. 케일은 꺼진 영상구를 한 손에 들고 다시 나무 그늘로 향했다. 그가 오기까지 앞으로 9-12시간 남짓, 그동안은 다른 사람과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
아이들과 물놀이를 하고 저녁을 먹었더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잘 곳은 리타나가 마련해 주기로 했다.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며 시간을 헤아렸다. 곧. 생각 좀 한답시고 해변을 걷고 있자니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제 왔어, 형?"
"그래. 오랜만이야, 동생"
뒤를 돌아보니 시원한 차림의 다크 엘프가 서 있었다. 케일 헤니투스의 연인 알베르 크로스만. 여전한, 하지만 그리운 모습이었다. 저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 만인지.
"형 옆에 있으려면 자제심을 많이 길러야겠어."
"왜? 내가 너무 예뻐서?"
케일은 말없이 해변을 걷는 것으로 대답을 삼켰다. 하여튼 본인 예쁜 건 가장 잘 알고 계시지. 알베르도 그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아 조용히 웃었다. 케일이 뒤돌아 가던 길을 가자, 그 뒤를 알베르가 따라 걸었다. 모래 위에 새겨진 발자국 위에 발을 얹고 또 얹고.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케일이 다시 말을 걸었다.
"언제까지 제 뒤를 따라오실 겁니까?"
"형제 놀이는 끝났나? 형은 섭섭해."
"헛소리 하지 말고 대답이나 해, 형."
장난치듯 흑흑 소리를 내던 알베르가 씨익 웃었다.
"내가 동생 뒤를 걸어보는 일이 얼마나 된다고 그래. 매번 내가 앞서 나가야 하니 동생 뒷통수를 볼 일이 있어야지. 이럴 때 많이 보려고 그러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
"…그것참 대단한 대답이네, 형. 내 뒤통수가 비어있는 내 손보다 중요한가봐?"
케일은 비어있는 양손을 보여주며 말했다. 그제야 아차 한 듯 알베르가 그 옆으로 갔으나 케일이 이미 뒷짐을 지고 있어 손을 잡을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잘못했으니 거기 고운 손 좀 내어주지, 케일."
"형이 뭘 잘못했다고 그래. 내 예쁜 뒤통수나 실컷 봐."
케일이 미소를 띠며 말하자 알베르는 곤란한 듯 웃었다. 그리곤 한참이나 케일의 뒷짐 진 손을 보더니 그 위에 자신의 왼손을 살포시 올려두었다. 왼손으로 간질이듯 그의 손바닥을 긁으니 케일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그려졌다. 간지러움에 슬쩍 뒷짐이 풀리자 알베르는 때를 놓치지 않고 케일의 오른손을 잡아 손깍지를 꼈다.
"이렇게 가면 되겠네. 네 옆모습도 보고 손도 잡고?"
"그걸 이제야 알았어, 형?"
케일은 이제야 만족한 듯 피식 웃었다. 알베르도 그런 케일을 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손을 잡고 한참 동안 해변을 걸으니 금세 주위가 어둑어둑해졌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본 케일이 말했다.
"아, 별이."
"응?"
두 사람이 고개를 올려다본 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강을 이루고 있었다. 은하수, 김록수일 적에는 볼 수도 없었던. 아니, 그때는 고개를 올려다볼 여유가 있었던가? 어찌 됐든 두 생을 걸쳐 처음 보는 은하수였다. 주변에 불빛이 없어서 그런지 더욱 반짝이는 듯 했다.
"당신은 은하수를 본 적이 있습니까?"
"몇 번인가. 하지만 이렇게 맑은 은하수는 정말 오랜만이군.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야. …자네랑 같이 보는 은하수라 그런지 더욱 빛이 나는 것 같군."
"느끼합니다."
"…자네, 불경해."
"다리 아파. 이제 좀 앉자, 형."
불리할 때만 형이지…. 제가 언제 불리할 때가 있었습니까? 아니, 없지. 하늘을 올려다본 두 사람이 시답잖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대부분 케일 일행의 이야기를 하며 현재 정세에 대해서도 간간이 말이 나왔다. 이야기하는 동안 두 사람은 하염없이 손을 잡고 있었다. 문득 이야기 도중 침묵이 흐르고, 케일이 나지막하게 알베르를 불렀다.
"저하."
"왜?"
"이때까지 그러했듯 저하가 걸어가시는 발 걸음걸음마다 제가 함께할 겁니다. 뒤에서 걷든, 앞에서 걷든, 옆에서 걷든. 언젠가 저하가 이제껏 했던 일들을 돌아볼 때, 그 일들이 찬란하게 빛나는 별이 되어 은하수를 이룰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
"당신이 종족에 구애받지 않고 이렇게 찬란한 길을 이룩하였노라 말할 수 있게 제가 만들 겁니다. 그 길을 다시 돌아올 때, 당신과의 일을 하나하나 되짚어가며 이런저런 일이 있었노라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당신을 위해 걸어온 길을, 당신과 함께 걷고 있어 행복하다고 말해드릴 수 있도록."
어때요? 라며 쳐다보자 귀 끝까지 붉어진 알베르가 무릎 사이로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케일은 비어있는 손으로 그의 뒤통수를 쿡쿡 찔러보았지만, 알베르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왜 이렇게 부끄러워합니까, 저하. 저까지 민망해지게."
"자네는, 그런 말을 해놓고…!"
"그런 말이라니, 진심인 사람한테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아, 더 붉어졌다. 알베르의 초콜릿색 피부가 묽게 물드니 괜히 더운 것 같았다. 여름의 무더위 때문에 붉어진 것인지, 지금 이 상황 때문에 붉어진 것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알베르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나도, 자네의 앞에서 환한 빛을 발할 수 있는 찬란한 빛이 되겠다고 약속하지. 자네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로운의 별'이 되어보도록 하지."
"부디 '로운의 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로운의 태양'이 되시길. 로운의 앞길을 가장 밝게 밝히는 영광이 함께 하시길."
자네 정말 끝까지…. 멋있죠, 알고 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지 알 수 없었지만,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걱정할 것 같다.
"알베르, 이제 슬슬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돌아갈 겁니까?"
"아니, 타샤에게 말해두었으니 괜찮을 거야. 오늘은 머무를 생각일세."
"잘 됐네요."
잘 됐지, 일거리를 빨리 처리하고 자네와 놀 수 있으니까. 알베르가 중얼거리자 케일이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왜, 왜 그러는데. 알베르가 당황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자 케일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몸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며 아직 앉아있는 알베르를 보며 말했다.
"제 예쁜 뒤통수요. 오늘 밤에 많이 보시라고."
"그게 무슨……."
"싫으시면 얼굴도 좋고요."
"…케일?
"뭐, 못 알아들으셨으면 말고요."
"…허? 케일…!"
케일이 먼저 자리를 뜨자 벙쩌있던 알베르는 그제야 일어나 그를 쫓았다. 케일, 케일!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도 케일은 돌아보지도 않고 경쾌하게 자리를 옮겼다. 오랜만에 만난 연인을 놀려먹는 것이 이렇게나 즐거워서야, 원. 어느새 다가온 알베르가 '케일? 내 말 듣고 있나?' 하고 묻는 말에 케일은 씨익 웃었다.
고개를 돌려 똑바로 눈을 맞추니 알베르가 순간 움찔했다. 멀어져 있는 거리만큼 그에게 다가간 케일은 굳어있는 그 볼에 작게 입을 맞추었다.
'쪽-'
"다 들립니다, 알베르. 사람들 깨우고 싶은 게 아니라면 조용히 따라오시죠."
"하아……. 케일, 자네는 정말."
오늘 몇 번이나 본 붉어진 얼굴을 또다시 손으로 가리며 알베르가 말했다. 남아있는 한 손을 잡은 케일이 알베르를 이끌었다. 은하수가 뜬 밤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__________ fin.
큐로스
@KYUUROS
[ 은하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