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교에서의 마지막 여름.
많은 학생들이 앞으로의 입시와 진로에 대해 불안감을 갖거나 긴장하는 시기.
그러나 알베르 크로스만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입학 때부터 당연히 자기 자리라는 듯 학년 1등을 놓치지 않았으며 현재는 학생회장, 회장으로서 일하는 솜씨도 뛰어나다는 평에 주위의 평판도 좋고 신임도 두텁다. 그러한 능력으로 졸업시험은 물론 대학 입학까지 진작에 준비해두고 있었으니 새삼 불안을 느낄 리 없었다.
알베르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알베르는 목표를 위해 수많은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며 다시 계획을 짜맞추는 데에 익숙한 삶을 살아왔다. 능력과 행동 뿐 아니라 사소한 눈짓 하나, 손짓 하나까지 어떻게 보여지는지 계산하며 지내온 시간은 이미 익숙해져 새삼 번거로울 것도 없었다. 불확실한 요소가 있다면 그 위에 더욱 정교한 계획을 몇 겹으로 쌓아올려 단단한 발판으로 바꾸면 된다. 알베르는 그런 것에 답답함을 느끼는 게 아니라 만족감을 느끼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생활도 그러했다. 자신이 성인이 되기 전의 마지막 교육과정. 대학에 들어가면 곧바로 후계자로서 경영수업을 병행하며 본격적인 대외경력을 쌓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 전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능력을 다듬고 앞으로의 계획을 다시 검토하며 보낼 수 있는 시기로 여기고 실제로 그렇게 보내고 있었다. 지나가는 한때라고 해서 허투루 넘길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렇다고 미련과 불안을 느낄 이유도 여유도 없다. 다른 동급생들이 진로와 시험에 대해 이야기하며 왁자지껄한 한때를 보내는 동안, 알베르는 겉으로는 항상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더 앞의 미래를 계획했다.
***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까. 알베르는 눈 앞의 붉은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답지않게 잠시 멍하니 있었다.
"선배? 뭐해요?"
테이블 위에 놓인 쿠키들을 손이 닿는 대로 바쁘게 집어먹던 손이 멈추고는 곧 알베르 쪽을 바라본다. 알베르는 곧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을 가장하고 어깨를 으쓱하고는 쿠키 부스러기가 묻어있는 케일의 입가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아무것도. 그거 마음에 들었나 보네."
"네, 맛있네요. 더 갖다놔 주세요."
"그래, 그래."
당연스럽게 요구하는 케일의 태도가 기꺼워 피식 웃음이 터졌다. 물론 케일도 알베르가 그 정도는 얼마든지 들어준다는 걸 알고 말하는 것이다. 군것질거리는 별로 가까이 하지 않던 알베르의 책상에 케일을 위해 단 과자들이 이것저것 놓여있게 된지도 몇 달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아니지 않냐는 케일의 눈빛은 모르는 척 흘려넘겼다. 자신이 모르는 척 했다는 것을 케일도 눈치챘겠지만 이 정도의 사소한 회피는 넘어가줄 수 있는 사이이니 괜찮을 것이었다.
알베르는 케일을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카락.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 내리깐 어두운 갈색의 눈동자. 다시 쿠키를 집어들어 입으로 가져가는 마른 손가락. 그리고 열리는 얇은 입술. 알베르는 다시 시선을 뗐다.
어느날 마주친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맹랑한 1학년생은 언제나와 같았던 알베르의 일상을 확 바꿔놓았다. 매일 일정한 계획에 따라 움직이며 빽빽하지는 않은 듯 보이지만 사실은 빈틈없이 설계되어있던 알베르의 시간은 케일에게 조금씩 곁을 내주게 되었다.
그것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불쾌했다면 진작에 웃는 얼굴로 벽을 두르며 접근을 차단했을 것이다. 케일과 처음 눈이 마주친 순간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 뒤로 그를 더욱 알아갈수록 같지만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케일과 이야기하고 그를 지켜보고 더 알아가는 그 과정 자체가 즐거웠다. 알베르는 그런 것에서 순수한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자신에게 조금 놀랐다.
학교에서 그동안 알베르는 그가 아는 모두와 사이는 좋지만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었다. 웃는 얼굴로 상대방이 눈치조차 채지 못할 정도로 능숙하게 선을 긋고 모두를 상대했다. 누군가는 그런 알베르의 모습을 고등학생답지 않다고 평할지도 모르지만 알베르는 이미 그렇게 지내는 것이 습관으로 몸에 배어버려 불편함도 느끼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케일은 달랐다. 그는 단번에 성큼성큼 다가와 알베르가 세우고 있던 무형의 벽을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넘어버렸다. 마치 그에게만은 처음부터 벽을 세우지 않았던 것 같을 정도였다. 누군가와 솔직하게 마주한다는 것이 이렇게나 즐겁다는 것을 알베르는 오랜만에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최근 알베르는 케일을 볼 때마다 마음에 묘한 일렁임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아직 모른다. 케일을 바라보며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그 감각이 무엇인지, 어째서 느끼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알베르는 자신이 그동안 인간관계를 얕게 쌓는데만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이런 감정의 정체를 알아채는 것에는 빠르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케일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니 그것이 자신에게 뭔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알베르는 케일에 대한 신뢰로 막연하게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드물게도 명확한 근거가 아니라 감에 의해 내린 판단이었지만 알베르는 그것이 맞을 것이라 믿었다. 만난지 단 몇 달밖에 안 된 두 학년 아래의 후배지만 이렇게 잘 통하는 사람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마주치든 또 만나기 힘들 것이라는 확신 정도는 있었다.
학생회실의 채광이 좋은 커다란 창에 어느새 오후의 쨍한 햇빛이 아니라 부드러운 붉은 색의 노을이 흘러들어왔다. 알베르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생각하며 케일을 부르려 하다 멈칫했다. 붉은 머리카락에 노을빛이 겹쳐지는 모습에 잠시 시선을 빼앗겨 말을 잃었다. 케일은 마치 처음부터 노을에 잠겨있던 것처럼 그 풍경과 잘 어울렸다. 알베르의 마음 속에서 불안과도 닮은 마음의 일렁임이 더 커졌다.
두근. 두근. 왠지모르게 강해진 심장박동을 진정시키듯 알베르는 최대한 티나지 않게 심호흡을 하고 케일을 불렀다.
"케일."
어째서인지 그새 생각에 잠겨있던 듯한 케일이 그 부름에 알베르를 돌아보았다.
"바다 보러 갈래?"
알베르는 말을 하고는 바로 흠칫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기숙사로 돌아가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주홍색 햇빛에 잠겨있는 케일의 모습에서 노을지는 바다를 떠올리기라도 한 걸까. 알베르는 자신이 방금 뱉어버린 말을 수습하려 다급히 다시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러죠."
마치 이 앞의 정원에 잠시 다녀오자는 제안에 답하기라도 하는 여상한 말투로 케일은 바로 승낙했다. 알베르가 잘못 말한 것이라고 핑계를 댈 틈조차 없었다. 그러고는 케일은 바로 일어나더니 알베르에게 다가가 팔을 잡아끌었다.
"얼른 가요."
"응?"
"여기서 바다까지 가려면 시간 꽤 걸리잖아요. 바로 출발해야죠."
"...응?"
"얼른요."
알베르는 뭐라고 답도 못한 채 케일에게 그대로 이끌려 학생회실을 나섰다. 케일을 따라 넓은 교정을 걸어 교문 밖으로 나오면서도 알베르는 지금의 상황을 채 이해하지 못해 얼떨떨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순간 잘못 뱉은 말에, 케일은 바로 승낙했고, 우리는 지금 둘이서 정말 바다에 가기 위해 교문 밖을 나가 기차역으로 향하고 있고. 둘이서. 단 둘이서.
조금 생각이 돌아오려다 머릿속이 다시 고장이 난 것 같았다. 무슨 일이든 능숙하게 수습해내던 평소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아직도 멍한 채인 알베르를 데리고 케일은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기차역으로 가 바로 표를 두 장 샀다.
"자, 꾸물거리지 말고 얼른 가요."
알베르는 케일과 기차 안에 마주앉고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정말 가는건가? 이래도 되나? 계획하고 말한 것도 아니었고 자신도 왜 말했는지 모르겠는 그런 말이었다. 하지만 케일은 당연하다는 듯이 턱을 짚고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베르는 언제나 케일의 눈을 보자마자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바로 읽어내는 것에 익숙했지만 이번에는 아무리 케일의 눈을 바라봐도 그가 어떤 생각으로 이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바다에 가려고 해도 기차를 타고 꼬박 두 시간은 가야 했다. 그동안 알베르와 케일은 말없이 서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알베르는 저도 모르게 뱉은 말 때문에 벌어진 지금의 상황과 케일의 행동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느라 말할 여유가 없었고, 케일은 다만 멍한 듯도 하고 생각에 잠긴 듯도 한 시선을 바깥으로 향해 기울어지는 해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바다에 도착하자 어느새 해는 완전히 져 주위는 어두워져 있었다. 사람이 많을 법도 한 여름이었지만 다행히 휴가철을 미묘하게 비껴난 시기이기 때문인지 밤의 바다는 한적하고 조용했다.
"그러고보니, 무단외박이잖아."
벌써 밤이니 지금 바로 다시 학교로 향한다고 해도 기숙사의 통금시간은 아득히 넘어버릴 것이다.
"그걸 이제 말해요?"
어차피 하룻밤의 무단외박 정도는 간단히 무마할 수 있으면서. 케일의 시선이 말했다. 물론 그렇긴 했다. 알베르는 학생회장의 권력을 남용하지 않는 범위에서 지금 상황을 수습할만한 방법을 즉시 다섯 가지 정도는 떠올릴 수 있었다.
케일은 바로 바다를 향해 앞으로 걸어나갔다. 알베르가 그 뒤를 급히 뒤따랐다.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에 케일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선명한 붉은 색은 어두운 가운데서도 여전히 눈에 띄었다. 알베르는 곧 케일의 옆으로 가서 천천히 걷는 케일에게 보폭을 맞추어 나란히 걸었다. 두 사람 다 말은 없었다. 둘이 있을 때엔 굳이 말을 해도 되지 않다는 것이 편안했다. 한적한 바닷가의 모래사장에 두 사람의 발자국이 줄지어 나란히 찍혔다.
***
"아까 선배 얼굴 진짜 웃겼어요."
"그래. 웃어라..."
케일은 눈가에 눈물까지 맺힐 정도로 한바탕 신나게 웃고서도 아직 부족했는지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말하며 키득거렸다. 알베르는 붉어진 귀를 겨우 식힌 상태였다.
걷다가 슬슬 배고파하는 케일을 위해 뭔가 없나 찾다가(그렇게 하루종일 잘 먹는데도 어째서 계속 배고파하고 어째서 그렇게 빼빼 마른 건지 알베르는 케일을 보며 항상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노점을 발견했다. 기차표는 네가 샀으니 아이스크림은 내가 사주겠다며 부득불 케일을 설득하고는 지갑을 꺼내려는 순간 알베르는 자신이 케일에게 끌려 급히 나오느라 학생회실에 지갑을 두고 왔다는 것을 그제야 눈치챘다. 얼어버린 알베르를 보고 상황을 파악한 듯 케일은 숨기지도 않고 대놓고 웃음을 터트려버렸고 알베르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가장했지만 귀는 새빨개져 있었다.
선배의 그런 표정을 보는데 기차표와 아이스크림 정도면 싼 값이라며 케일은 방금 산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알베르는 그 말에 더 민망해졌지만 그렇다고 안 받을 수도 없으니 순순히 그것을 받아들었다.
먹을 것도 산 김에 잠시 바위 위에 나란히 앉아 쉬기로 했다. 문득 알베르는 이런 일탈이 태어나서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후배와 나란히 무단으로 학교를 빠져나와 바닷가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다는, 이제껏 계획도 해본 적 없으며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일. 역시 케일을 만난 이후로 의외의 상황을 자주 겪게 되는 것 같았다. 그것이 불쾌하긴 커녕 즐겁다는 것이 신기했다.
정말로 배가 고팠는지 아이스크림을 열심히 베어먹는 케일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케일이 주니까 받긴 했지만 딱히 식욕은 없었기 때문에 알베르의 아이스크림은 처음 상태 그대로에서 조금씩 녹아가기만 했다.
"그거 안 먹어요?"
"...그러게."
"아깝게. 아무리 밤이라지만 여름이니까 금방 녹는다구요."
그럴거면 저 주시든지. 케일은 그렇게 말하고는 바로 아이스크림을 든 알베르의 손 쪽으로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고는 자기 쪽으로 바로 끌어당겨서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물었다. 그렇게 확 당겨져 가까워진 덕에 어두운 가운데서도 알베르는 아이스크림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느라 내리깐 케일의 눈의 속눈썹 한 올 한 올까지 선명히 볼 수 있었다.
갑자기 심장박동이 커졌다.
한 입 더 베어물고는 고개를 드는 케일과 눈이 마주쳤다. 암갈색의 눈동자는 밤을 눈동자에 머금어 평소보다 더 어두워 보였다. 그 가운데 반짝이는 빛이 별빛같다고 생각했다. 그 외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알베르는 그대로 얼굴을 더 가까이했다.
차가워졌던 입술이 다시 체온으로 데워질 때까지 그렇게 둘은 움직이지 않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
케일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도 일주일 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알베르가 케일을 피해다닌 것이 일주일 째였다.
바다에서의 그 일 이후, 알베르는 케일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충동적으로 입술을 댔지만 문득 정신이 들자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한 건가 싶었다. 뻣뻣해진 채 천천히 입술을 떼고는 차마 케일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케일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대로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몇 시간 더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가 첫 기차를 타고 몰래 기숙사에 돌아왔던 것이 일주일 전이었다. 물론 무단외박 건은 알베르가 잘 수습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일은 없었다.
그동안 학년은 달랐어도 점심시간마다 얼굴을 보고 수업이 끝난 뒤엔 학생회실이나 도서실에서 거의 함께 있던 알베르와 케일이었지만 알베르는 일부러 학생회실엔 케일이 찾아오지 않을 시간에만 가서 일을 처리하고 그동안 케일과 겹쳤던 동선을 전부 바꾸었다. 서로 기숙사 방의 위치는 알고 종종 찾아가기도 했었기 때문에 케일이 굳이 알베르를 만나겠다면 방에 직접 찾아갈 수도 있었을 테지만 케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조차 케일에게 배려받는 느낌이 들어 알베르는 더욱 케일에게 미안해졌다.
그렇게 충동적으로 입술을 맞댄 후에야 알베르는 케일에 대한 감정과 그동안 케일을 볼 때마다 느끼던 마음의 일렁임의 정체를 겨우 알아낼 수 있었다. 자신이 빠질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감정이었기에 무의식중에 그것으로 답을 내는 것을 회피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가 바보같았다.
몇 개월 뒤 이 곳을 졸업하면 케일의 남은 고등학교 생활을 더는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은 더더욱 깨닫고 싶지 않았다. 짧은 시간동안 말 한 마디 없이도 통하는 상대의 소중함을 알아버렸는데 이제와서 다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마치 투정부리는 어린아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쉴새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기분을 감추고 평정을 가장하는 데만도 알베르는 상당한 에너지를 소비해야 했다.
그런 깨달음들이 연속적으로 밀려들어오자 알베르는 더는 케일의 얼굴을 멀쩡한 채 마주할 자신이 없어졌다. 이런 상태로 케일을 만나게 되면 그 앞에서 꼴사납게 온갖 감정을 다 드러낸 얼굴을 보여버릴 것만 같았다. 케일이 올만한 시간을 피해 늦은 시간 혼자 학생회실에 틀어박혀 업무를 홀로 처리하고는 알베르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이만 기숙사에나 돌아가자.
그 순간, 노크도 없이 학생회실의 문이 열렸다.
케일이었다.
"...!"
"일주일이면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케일..."
"저한테 뭐 할 말 없어요?"
"..."
"설마 해봤더니 별로라서 식어버렸-"
"그럴 리가 없잖아!"
알베르는 화들짝 놀라 그대로 책상을 치며 일어섰다. 꽤 큰 소리가 났지만 두 사람다 거기에 신경쓰지는 않았다. 알베르는 갑자기 나타난 케일에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하고 반쯤 패닉이 된 상태였고 케일은 부루퉁한 얼굴로 알베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이 기껏 용기를 내줬더니..."
"...?"
케일이 뭔가 작게 중얼거리는 듯 했지만 알베르는 내용까진 듣지 못했다. 알베르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는 데만도 꽤나 노력을 기울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할 말 있을 거 아니에요."
설마 그것까지 나한테 먼저 말하게 할 셈은 아니겠죠. 케일이 불만스런 눈빛으로 알베르를 바라보았다. 알베르는 생각이 더욱 뒤엉키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 대체 언제부터 알아챈 거지? 자신은 스스로도 모르다가 이제서야 겨우 알았는데? 그리고 케일의 저 반응은...설마 케일도?
순식간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머릿속에 들어온 정보를 처리하는데 빌어먹게도 능숙한 알베르의 두뇌는 지금의 이 상황까지도 금세 정리해냈다. 알베르의 감정이 지금의 상황을 쫓아가지 못하는게 문제였지만.
그러니까, 케일이, 케일도, 나를?
알베르는 지금 자신이 엄청나게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표정을 다듬을 여유조차 없었다. 최근 일주일 간 자신의 온 신경을 빼앗아갔던 대상이 바로 눈앞에 있었고, 그리고 그는, ...
알베르는 여전히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는 듯 숨을 깊게 내쉬며 침을 꿀꺽 삼켰다. 결국 생각보다도 더 얼빠진 꼴로 케일과 마주하게 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것을 따질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답은 하나였다. 그런 쓸데없는 건 신경쓰지 말고 자신은 힘껏 눈앞의 사람을 붙잡는데 집중했어야 하는 거였다.
너그럽게도 그런 알베르를 기다려주고 직접 기회까지 주러 온 후배는 알베르의 눈앞에서 여전히 불만스런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동시에 알베르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케일의 볼도 붉어져 있었다. 케일은 이미 케일 나름대로 최대한 용기를 내고 있었던 거였다.
알베르는 미안함과 고마움과 애틋함 등의 여러가지 감정들이 또다시 케일을 향해 뒤섞이는 걸 느끼며 심호흡을 했다. 아마 그것들을 모두 섞어 하나로 만들면 사랑스러움이라는 답이 나오지 않을까.
알베르는 드디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세 음절의 단어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케일이 환하게 웃음지었다.
피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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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바다와 별과 그리고]
__________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