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고 작은 흉터가 날카로운 얼룩으로 남은 손가락이 조명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빛은 넉넉하고 편안하게 벌어진 흰 소매에 잔잔하게 반짝이며 부서져 번져나갔다. 안온한 평화였다.
침대 위에 설익은 평화를 걸친 최한의 몸뚱아리가 놓여 있었다. 헤니투스 백작가에 있는 최한의 방이었다. 포근한 주황색이 방 안을 은은히 밝혔다. 노을빛이었다. 창 밖에는 검푸른 배경 위에 별들이 멀쩡히 빛났다. 한참을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오는 빛을 쳐다보던 최한은 일어나 조명을 껐다. 가짜 노을을 끄니 어둠이 방 안을 덮었다.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최한의 공간에서 사라졌다. 다만 최한은 빛이 없어도,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게 무엇이든.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그러나 창 밖에서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이었다.
제대로 정돈된 공간에 잠옷을 입은 몸뚱이가 안전하게 놓여있었다. 최한은 아주 오래 전부터 어딘가에 매여 있고 싶었다. 헤니투스 성씨를 가진 이들의 방과 같지는 않겠지만 그 품은 안락했다. 가지고 싶었던 것은 헤니투스 성씨가 아니라 가족이었기 때문에 최한은 마냥 좋았다. 새로 만난 가족들은 귀엽고 다정하고 따스했으며 강했다. 함께하는 집이었다. 최한은 기꺼이 묶이었다. 비록 최한은 홀로 어둠의 숲에 떨어져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최한은 한 순간에 그 안에서 자신이 사라질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최한의 거처는 품안보다는 울타리에 가까운 곳에 있었다. 실재하는 거처가 울타리 근처라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최한은 여전히 숲 속에 기거했다.
울타리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최한의 세계는 재조립되었다. 완전한 안전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존재는 최한을 아무렇게나 집어서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버릴 수 있었다. 부당한 처사였으나 어느 곳에도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었다. 주변은 울부짖음으로 가득 찼고 쫓기는 발을 잘못 딛으면 굴러 떨어져 어딘가 박살이 나야 했다. 지친 몸을 누인 땅에서는 평범한 낯을 한 풀잎이 독을 뿜었다. 이름이 아닌 모든 것을 게워내며 최한은 살아냈다. 그동안 채워넣었던 인간관계와 도덕과 감정 같은 것들을 최한은 모두 거꾸로 뒤집어 토해냈다. 그러지 않으려면 죽어야 했다. 죽은 인간이 될 것인가, 살아있는 비인간이 될 것인가. 최한은 살아있기를 택했다. 억울한 사정을 시체로 만들어 묻어버리려는 공간에서 최한은 썩어 문드러지지 않기 위해 나뭇잎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빛줄기를 필사적으로 부여잡았다.
헤니투스 가 최한의 방에 설치된 조명이 최한의 손가락 틈새로 나뉘어 들어왔다. 최한이 주먹을 꽉 쥐어 빛줄기를 잡으려 하자 손가락이 사라진 자리에 빛이 들어차 곧바로 최한을 향했다. 눈이 부셨다.
이 빛의 근원을, 최한은 찾고 싶었다. 다시 잡을 수 있게 된 빛의 근원.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면, 사람 틈에 살아가려 하지 않았다면, 어두운 그 곳의 여느 괴물들과 같이 살아가는 데에 만족했다면, 다시 잡을 수 없었을 빛.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최초의 고향에서의 기억.
최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나섰다.
***
“로잘린, 그게 정말이야?”
넓은 짱돌저택의 어느 복도에 최한의 목소리가 울렸다. 특유의 차분한 음성에 벅찬 감정이 담겼다. 많은 것이 달라진 요즈음에야 최한의 즐거운 기색을 자주 느낄 수 있지만, 방금은 조금 특별한 느낌이었다고, 로잘린은 생각했다. 용병 시절, 사방의 모든 것을 경계하고 다가오는 위협을 무자비하게 베어내던 검은 눈동자가 잠시 기억 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래. 내가 한다고 하고 못하는 거 본 적 있어?”
로잘린의 말려올라간 입술이 뿌듯한 곡선을 그렸다. 아닌 게 아니라 최한이 부탁한 일을 성공시키느라 몇 달을 연구실에 틀어박혀 지냈다. 아는 지식과 인맥을 총동원해서 만든 것은 아마도 최한의 삶을 완전하게 만들 것이었다.
가끔씩 로잘린은 최한이 하는 말과 행동을 조각조각 모아 곱씹어보곤 했다. 외로운 시간 속을 방황했다던, 17세의 소드마스터. 돌아갈 곳이 생겼다던 아이. 해리스 마을의 일 너머에도 무언가 있을 것 같았지만, 그뿐이었다. 로잘린이 굳이 파헤쳐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것은 온전히 최한의 몫이었다.
“가족들한테 이야기는 다 했지?”
“물론이지.”
소년 같은 얼굴에 선하고 따뜻한 미소가 맺혔다. 로잘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에서 어떤 액체가 담긴 병을 건넸다. 속이 보이지 않는 병이라 액체의 색은 보이지 않았다. 최한은 묵직한 병을 받아들고 잠시 가만히 서있었다. 로잘린은 아주 잠깐이지만 분명히 존재한 몇 초를 그 옆에서 지켜보다가 이윽고 걸음을 옮기는 최한의 뒤를 따랐다.
최한의 방은 간소했다. 방 모서리에 맞추어 침대가 놓여있었고 옆에는 옷장이 있었다. 옷장은 작지 않았지만 로잘린은 그것이 갑옷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옷장이 놓이지 않은 편의 벽에는 책상과 책장이 있었다. 책장에는 조금 여유를 두고 책이 몇 권씩 꽂혀있었다. 공들여 읽었는지 조금 허름해보이는 책들이었다. 사용하는 공책으로 보이는 것들도 몇 권 있었다. 책상 위에는 커다란 창이 있어 바깥이 내다보였다. 그외에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책장 옆의 서랍에 정리되어 들어가 있는 듯 보였다. 전체적으로 최한을 닮은 방이었다.
최한은 최한을 닮은 정갈한 침대에 올라 앉았다. 병의 마개가 열렸고 최한의 입에 입구가 닿고, 그러고는 최한의 목울대가 여러 차례 울렸다. 다시 병의 마개가 닫기고, 병이 책상 위에 놓이고, 최한은 입가를 손등으로 훔쳤다. 로잘린은 침대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로잘린, 고마워.”
“그래. 잘 다녀와.”
“…잘 부탁해.”
로잘린은 최한의 마지막 말이 남은 사람들을 잘 부탁한다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다. 최한은 침대에 바로 누워 눈꺼풀을 닫았다. 로잘린은 이불을 끌어 똑바로 덮어주었다. 바깥에는 온 천지에 쌓인 낙엽이 바싹 말라 문을 두드리는 겨울을 맞이할 채비를 끝내고 있었다.
로잘린은 최한의 숨소리가 고르게 퍼지자 일어나 불을 끄고 방을 나갔다. 그 뒤로 몇 날 며칠을, 검은 용과 빨간 고양이, 회색 고양이, 회색 늑대, 노인과 그의 아들이 다녀갔다. 때때로 붉은 머리의 남자가 함께였다. 갑옷을 입고 호들갑이 심한 기사가 때때로 찾아와 지켜보다 가기도 했고, 고양이털을 옷에 잔뜩 묻힌 집사가 방문하기도 했다. 눈이 맑고 로브를 입은 네크로맨서와, 비슷한 피부의 소드마스터도 종종 들여다보고 갔다. 로잘린과 백금발의 용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제 스스로 검은 머리 인간이 눈을 뜨고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올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첫눈이 내리고 겨울이 깊어졌다. 최한은 눈을 뜨지 않았다.
***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면 산 자는 어떠한가. 최한은 죽지 않았지만 말이 없었다. 모든 것을 다 게워내도 언어만은 게워내지 못했다.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한 채 혼자였지만 그마저 잊는다면 최한은 더 이상 인간으로 남을 수 없었다. 기이하게 뒤틀려 다른 생명을 탐하는 괴물들의 울부짖음에 자신의 목소리를 섞고 싶지는 않았다. 울부짖음은 소통이 아니었다. 생존을 향한 발버둥이었다. 각각의 개체는 모두 혼자였다. 혼자라는 건 그런 거였다. 그들 틈에 섞여 발버둥치면서도 최한은 그들과 같이 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절망에 잠기고 싶지 않아 행복했던 순간을 모두 비워냈지만 갈 곳을 잃은 채 배회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그토록 당연히 존재하던 주변이 흔적도 없이 삭제될 수 있음을 각인시켰다. 그것은 스스로의 의지와는 관련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죽음과도 같아서 최한에게 소멸될 수 없는 후회를 남겼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한 단 하나의 길이었지만 최한은 후회를 멈추지 않았다. 인간이기를 선택했으니까.
최한의 눈 앞에 다른 곳과 다를 것 없는 숲이 보였다. 어둠의 숲이라고 불리는 이상한 숲이었다. 최한은 이 너머에 두고 온 것이 있었다. 기억. 어둠의 숲에서 시작된 비인간의 삶을 인간으로 있도록 붙들어준 시간. 그것을 찾기 위해 최한은 발걸음을 뗐다.
검은 인영이 검은 숲속으로 멀어져가다 사라졌다.
***
“인간아! 눈이 많이 온다.”
벌써 올 겨울 열 다섯 번째의 눈이었다. 유독 눈이 자주, 그리고 많이 왔다. 라온이 눈 내리는 걸 본다며 창을 활짝 열어젖혔다. 어떤 음성의 메아리 같은 것이 케일의 귀에 들어와 꽂히고, 추운 공기가 덩어리째 케일의 얼굴을 때렸다. 그래도 온종일 따뜻한 곳에 있다가 잠시 들어온 찬 바람 정도야 시원하니 괜찮았다. 오래 열려있으면 힘들겠지만. 너무 추우면 창문만 다시 닫으면 될 일이었다. 아니면 보온 마법을 부탁하면 될 일이고.
“라온.”
“왜 그러나, 인간?”
“손에 든 책이 눈에 다 젖고 있는 것 같은데.”
검은 용이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손을 방안으로 들였다. 순식간에 눈송이가 날아가고 스며든 물기가 말라 사라졌다. 우글우글 울어버린 종이도 말끔히 펴졌다. 역시 라온. 케일은 감탄하다 이어진 라온의 말에 물음표를 그렸다.
“인간, 미안하다! 원래대로 만들었다. 돌려주겠다.”
쩔쩔매는 어린이 파충류의 귀여운 표정에 케일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나갔다.
“내 거 아닌데?”
라온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책과 케일을 번갈아 보더니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에 복도에 떨어져있었다. 들여다보니 읽을 수가 없어서 저택 안의 식구들에게 물어보고 다녔는데, 다 자기 거 아니라고 했다. 인간 것 아닌가?”
“봐봐.”
케일은 라온에게서 책을 받아들었다. 휘리릭. 빠르게 책장이 넘어갔다. 얼마간 빠르게 넘어가던 책장이 느려지기 시작하다가 다시 맨 앞으로 돌아갔다. 암갈색의 눈이 가라앉았다. 어딘가 서툰 듯 적힌 모음과 자음이 시선에 담겼다. 이 곳에는 존재하지 않는 언어가 적혀있었다.
“최한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라온의 모습이 보였다. 케일은 창밖을 응시하다 한스에게 말했다.
“춥네. 따뜻한 것 좀. 마실 거.”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한스가 빠르게 방을 나갔다. 창문은 아직 열려있었고 라온의 마법으로, 눈은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만 휘몰아치고 있었다. 지금 이 곳은 추운 겨울이었다.
***
습한 공기가 피부에 들러붙는 한국과 달리 이 곳의 여름은 건조했다. 매미도 울지 않았고 늦여름의 잠자리도 없었다. 아직 한여름이지만 이곳에서 여러 번의 여름을 살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나비는 있었다. 이 숲의 나비는 좀, 예쁘진 않고 무섭게 생긴 편이었다. 그래도 꽃은 예뻤다. 구름은 흘러다녔다. 나무는 자랐고 몬스터는 자기들끼리 싸우다 죽고 살아남고 했다. 나는 그 틈바구니에서 홀로 멈춰있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살아남았고, 모든 걸 견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라거나 변하지 않았다.
숲에서는 사람이라곤 나 혼자 뿐이었다. 여기가 어딘지 물어볼 사람도 없고, 끔찍한 소리로 웅얼거리는 괴물들만이 돌아녔다. 처음엔 죽을까봐 무서웠고, 강해진 뒤엔 그냥, 죽이는 게 싫었다. 이 곳은 죽여야만 내가 사는 세계.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야 살 수 있었다. 마음이 불편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사람인가 고민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나는 시체는 아니었다. 나는 살아있었고 최한이었다. 죽지만 않으면 나는 최한일 수 있었다. 여기서 내가 최한이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나 하나 뿐이었으니까. 내가 죽으면 아무도 최한이 있었다는 걸 모르게 될 테니까.
나는 온 힘을 다해 최한을 아꼈다. 최한은 사람이었고, 살아가고 있었다. 맨발에 밟히는 야생초 진액의 미약한 독이 피부를 간지럽혔다. 저 멀리에서는 괴물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고 떠마시는 물은 주황색이었다. 맛도 이상했지만 시원해서 좋았다. 그런 여름이었다. 더 끔찍했을 테지만 이제는 지나가 조금은 각색되고 편안해진 그런 여름.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어느 여름이 있다.
겨울엔 생존이 어려웠지만 여름은 사람답게 살기가 힘들었다. 모든 게 빨리 상했고 금방 썩었다. 냄새는 뜨거운 공기를 타고 사방으로 퍼졌고 괴물의 오물은 말할 것도 없었다. 생존을 위해 가끔 괴물의 냄새를 풍겨야 했던 내게는 정말 고역이었다. 아프기도 여름에 더 아팠다. 잘못 먹고 탈이 나 쓰러져서도 아무도 돌봐줄 수 없었다. 내가 나를 돌봐야 했고 그 와중에도 생존을 위해 신경쓰고 끊임없이 이동하며 먹을 것을 구해야했다. 상한 것들밖에 보이지 않아도 먹어야했다. 나는 자주 아팠고 몸 얘기만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잘 상하고 썩는 계절엔 내 마음도 함께 썩었다. 썩은 부분을 도려내가며 나는 매해 여름을 보냈다.
옷 대신 걸치던 괴물이나 짐승의 가죽은 여름이면 썩은 부분들에서 끔찍한 냄새가 났지만 어쩔 도리 없이 입고 다녔다. 식물을 꼬아 만든 옷도 가끔씩 입었지만 이것도 금방 썩고 물이 배어나오기 일쑤였다. 가죽이든 식물이든 피부를 쓸거나 배기게 만들었고 배어나온 액체는 전신에 발진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냥 어디 가서 푹 쉴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살아가려면 그러기도 힘들었다. 발진과 상처에서 나오는 내 체액은 괴물들에게 맛있는 냄새를 풍길 테니 그걸 감추려면 다시 괴물의 무언가를 뒤집어써야했다. 그러면 당연히 더 아팠다. 하는 수 없이 하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괴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아무도 내 고통과 괴로움에 대해 몰랐다. 왜 그런 꼴이냐고 비웃을 사람조차 없었다. 여기는 사람 사는 곳이 아니었다.
밤에 울다가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밤에 울다가는 죽기 딱 좋았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처지에 서러움이 올라와 눈물로 쏟아질 때면 숨을 죽이느라 애쓰고, 마음놓고 울지도 못하는 신세에 서러워져 여전히 소리는 내지 못하는 채 눈물만 한바가지씩 쏟곤 했다. 이제는 요령이 생겨 서러운 일은 되도록 낮에 생각하고, 밤에는 생존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낮에 울고 있었다. 엄마, 엄마… 엄마……. 속으로만 되뇌이다가 안전하다는 판단이 들면 그제야 입밖으로 조금 내어 울었다.
“엄마…”
슬프게도 낮에도 크게 울 수는 없었다. 괴물에게 죽여달라고 사정하는 꼴이었다. 이대로 시체가 되면 엄마 얼굴은 영영 못 보나. 막연히 돌아가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엄마, 아빠의 얼굴은 다시 보고 싶었다. 내가 없어져 울고 계시진 않은지. 여전히 잘 계시는지.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 이웃들과 동네 똥개의 존재가 언뜻 뇌리를 산책하곤 했다.
숲의 여름은 가혹했다.
한국의 집에서는 보릿고개를 지나 추수한 보리로 양품 비빔밥을 해먹었다. 그리고 습해져 썩은 지붕을 새로 이었다. 짚더미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 그런지도 몰랐다.
아이스께끼. 얼음을 꽝꽝 얼린 것인데 조금 단 맛이 나고 더운 여름에 먹기 좋았다.
죄다, 숲에는 사람들이 없어서,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나를 유지하던 모든 것들로부터 격리된 곳이었으므로……………
***
“라온. 최한 좀 데려와.”
“힘들 것 같은데.”
“데려와.”
“…알았다!”
라온이 날개를 파닥거리며 눈 속을 날아갔다. 마법실력이 는 어린 용은 눈을 맞지 않고 유유히 날아갔다.
케일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눈을 감자 책에 쓰인 내용이 빠르게 지나갔다. 커다랗고 깊은 들숨과 날숨이 지나갔다. 몇십초인지 몇 분일지 모를 시간이 흐르고 라온이 돌아오는 바람이 느껴졌다. 케일이 눈을 떴다.
“케일 님.”
“어. 이거 네 거 맞지?”
최한이 책을 받아들며 케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보셨습니까?”
“어.”
케일은 최한의 눈동자를 그대로 응시했다. 일어난지 얼마 안 되어 이 내용들을 써내려갔을, 수십년의 시간을 홀로 고군분투한 소년이 아무렇지 않게 케일을 마주보고 있었다.
“어차피 못 읽어.”
케일은 거짓말을 했다.
“그런가요.”
최한은 애매한 대답을 했다.
“그런데 그게 뭐야?”
“제 삶을 돌아보고 싶어서요.”
“그래? 일기 같은 건가?”
“네.”
케일은 가벼운 말투로 흘러넘겼다.
“그럼 가 봐.”
“네.”
최한은 곧바로 인사를 한 뒤 뒤돌아 나갔다. 아주 빠른 걸음이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최한이 나가고 한스가 들어와 따뜻한 레몬 차를 건넸다.
뜨거운 걸로 달라고만 했는데. 당연하다는 듯 레몬차가 왔다. 분명 케일은 신 걸 싫어하는데, 어느새 적응이 되다 못해 정겨워진 것도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신 맛은 좋아하지 않았다. 찬 바람이 쌩쌩 들어오는 추운 겨울에,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기분 좋은 뜨거움이 케일의 손에 닿았다. 케일은 아주 조금씩 레몬 차를 음미했다. 참 셨다. 뜨거웠다. 하지만 날씨가 추워 괜찮았다. 옆에는 보온마법을 해줄 수 있는 라온이 있었고, 너무 뜨겁고 힘들면 창을 열면 되었다.
케일은 최한이 사라진 자리에 오래도록 시선을 두었다. 레몬 색 새콤한 여름이 담긴 컵이 케일의 입술에 닿았다. 만족스러운 여름이었다.
사랑을 담아
@Soonjeongmummu
[ Hot lemon te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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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___ fin.